[시론]촛불은 쇼인가 현실인가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 2008.07.25 10:05

디지털 루덴스와 빠순이의 힘

'프레임'이라는 책이 MB 정부 인수위의 필독서였다고 한다. '프레임'에 따라 동일한 세상을 다르게 본다는 메시지를 학습한 사람들이 정작 한국 사회의 다양한 프레임이 무엇인지를 아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왜냐하면, 출범 100일도 되지 않아 곤경에 빠졌기 때문이다.

주류도 아닌 중·고 여학생들에 의해 시작된 비주류 방식의 촛불시위와 사이버 공간의 괴담으로 완전히 내려 앉았다. 프레임을 알기 전에 사회에 커다란 변화, 또는 눈사태와 같은 엄청난 사건을 일으키는 조그만 자극의 효과인 티핑포인터(tipping-point)부터 알아야 했다.

디지털 세상에서 티핑과 같은 유행을 일으키는 주도 집단은 '디지털 루덴스'이다. 이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재미있는 일, 웃기는 일, 폭발적인 집단행동이나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유발할 수 있는 '꺼리'를 만들고 제공한다. '인터넷 괴담', '악플', '디시 폐인', '아프리카', '아고라' 등의 활동에 열광적으로 참여한다. 사이버 공간에서 '판'을 만들고 그것에 빠져든다. 새로움과 재미에 열정적으로 끌려 무엇에 열광적으로 빠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티핑은 못 만들지만, 티핑이 일어나는 일을 '대세'로 지각하고 또 그것에 집단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있다. '디지털 부머(boomer)' 일명 '디지털 빠순이'들이다.

디지털 빠순이들은 루덴스들이 만든 재미있는 행동을 따라 한다. 이 뿐 아니라 자신들의 관심에 따라 무엇에 추종한다. 이들은 혼자서 놀기 보다는 여러 사람들과 같이 노는 것을 즐긴다. 보통 개인주의적이고 즉흥적이지만 같이 모였다는 것만으로 서로 강한 유대감을 형성한다.

디지털 빠순이들을 촉발시키는 대상은 한국 사회에서 ‘대세(大勢)’로 자리 잡은 '그 무엇'이다. 대세는 처음에 '디지털 루덴스'들이 그리는 난장(亂場)에서 시작한다. 관심을 끌만한 사회적 이슈나 유행 또는 특정 대중문화 활동이다. 디지털 빠순이들은 이것을 따라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단지 남들이 하면 '나도 따라간다'.

대세의 단서에 동참해 대세가 형성되고, 빠순이가 대세의 주역이 된 대표적인 예는 2008년 5월의 첫 촛불 시위이다. 처음 촛불문화제에 참석한 사람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또는 막연히 연예인의 공연을 기대하면서 청계광장에 나왔다. 이들 중 대다수가 중고 여학생이었던 이유는 바로 이들이 루덴스의 놀음판에 집단적으로 참여하는 '디지털 빠순이'의 속성을 강하게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루덴스가 뿌려놓은 대세의 단서들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불편함과 불만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밉다고 누구나 쉽게 촛불시위로 거리에 나서지 않는다.

그러나 2008년 5월 2일과 3일의 촛불 시위는 '마음에 들지 않은 대통령'에 의해 티핑된 디지털 루덴스들이 만든 사이버 공간 속의 놀이였다. 그것은 '광우병 괴담'이나 '미친(美親) 쇠고기' 놀이이기도 했다. 이 놀이가 현실 세계로 침투하게 될 때, 빠순이들은 더 이상 사이버 공간이 아닌 현실의 무대 속에서 촛불시위 놀이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루덴스가 만들어 놓은 판에 그냥 참여한 빠순이들은 집회에 동참하면서 자신들의 집단 정체성을 형성했다. 그냥 공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제 '미국 쇠고기 수입'이나 '광우병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집단 정체성을 공유했다. 군중들에 의한 집단 학습이 일어났다.

급작스런 유행의 출현, 또는 대중문화는 바로 디지털 루덴스에서 벌여진 판이 하나의 대세로 디지털 빠순이들을 몰아갈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디지털 세상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루덴스와 빠순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일하는 '정보근로자'도 있고, 주류 질서와 규범과 논리, 합리성과 법치를 강조하는 '회사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모두 루덴스와 빠순이들의 놀이를 처음에는 일시적인 쇼로 무시한다. 하지만 점차 사이버 공간의 쇼가 현실로 침투하고 심지어 현실의 대세를 형성한다면, 이들에게 남는 것은 혼란과 무기력이다.

우리가 철저하게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그 무엇이 어쩌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촛불시위에 적용되었던 프레임은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었다. 이것을 '디지털 민주주의'나 '집단지성'으로 포장하기도 하고, '디지털 포퓰리즘', '불순 세력의 음모'로 보기도 했다. 무엇이 진실이든 누구에게나 보고싶은 모습으로 보일 뿐이다.

너무나 명확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때로 더 이상 확실하지도 않다. 아니, 분명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주류의 질서가 무너지고 비주류가 주류의 위치를 점하는 순간에 이런 불확실성과 혼란은 증가한다.

대중은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변화가 무엇인지를 알려고 노력한다. 그 변화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따라야 하는 '대세'가 된다. 대세 추종은 자신의 생존력을 높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된다.

한국사회에서 대세 형성과 대세추종 현상은 우리 사회를 더욱 역동적이게 만든다. 이 와중에서 마치 쇼(show)와 같이 일어나는 사이버 공간의 일들은 때로 구체적인 현실로 부각된다.

주류집단은 이런 변화를 당혹스럽게 또는 혼란으로 경험한다. 주요 사회 이슈와 현상이 주류에 의해 주도된 현실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비주류는 단순한 즐거움, 재미, 호기심과 같은 감성적인 요소에 바탕을 둔 우연한 행동들을 즐겨한다. 이들에 의해 사이버 공간의 쇼는 한국사회에서 점차 현실(reality)로 바뀌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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