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미국의 경우에도 공공부문과 대기업에서는 DB(확정급여형)이 아직도 지배적인 퇴직연금 형태로 자리잡고 있다. 전체적으로 가입자 수에서는 DC와 DB의 비율이 7:3이지만 자산규모는 3.5:6.5로 DB형이 많은 형편이다. 더욱이 자산운용 측면에서도 DB형과 DC형의 주식 비중은 별 차이가 없어 주식시장에서의 영향력도 산술적으로는 DB형이 더 크다.
셋째 퇴직연금의 주식투자 확대가 미국 증시의 강세를 뒷받침했다기 보다는 역으로 미국 증시가 장기간 호황을 누렸기 때문에 401k 플랜이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 관련 연구들의 대체적인 결론이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우리의 퇴직연금 시장이 DC형 중심으로 급성장하고 그에 따라서 주식시장도 장기 호황을 누릴 것이라는 장미 빛 전망은 애초에 빗나갈 수 밖에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진행 과정을 보면 퇴직연금 도입에 대한 불충분한 인센티브, 강제성 결여 등으로 인해 도입 자체가 더딜 뿐 아니라, DB/DC 비율도 7:3 정도로 DB가 선호되고 있는 형편이다. 또 DB의 극히 보수적인 자산운용 패턴, DC형에 대한 운용 제약(주식 비중 최대 40%) 등으로 인해 퇴직연금이 증시에서 차지하는 영향력도 미미하다.
따라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제도 개선에서는 퇴직연금 도입의 인센티브 및 강제성 제고, 그리고 운용 제약의 완화 또는 전면 폐지 등의 조치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기존의 퇴직금 제도와 별다른 차이도 없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정도의 제도를 가지고 우리 사회 의 보장 체계가 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퇴직연금 사업자(금융회사)의 자격과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사실 DB건 DC건 회사와 근로자 모두 금융 지식이나 투자 경험이 매우 일천한 초보 투자자이다. 더구나 운용 자금은 금이야 옥이야 소중히 여기는 퇴직금, 노후 생활 밑천이다. 이러한 돈을 그저 몇몇 펀드와 금리 상품만 던져 주고 알아서 투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성과가 좋고 나쁨을 떠나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 왜곡되는, 사회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많은 금융 회사들이 퇴직연금 시장을 그저 수수료 수입이 급증할 신성장 사업 정도로 인식하고 별다른 준비와 실력 없이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심지어 일부 재벌 기업들은 자신들의 퇴직 연금을 남 주기 아까워 금융업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퇴직 연금은 금융 산업의 한 부문을 넘어서 준 공공적 성격을 띤 사회 보장 체계의 하나이다. 사업자라면 그에 상승한 사회적 책임과 도덕성, 그리고 검증된 운용 능력 등을 충분히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소소한 이익을 위해 정도를 무시한 혼탁한 경쟁이 판을 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공신력 있는 우량 사업자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도록 효과적인 규제와 질서가 갖추어 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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