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名匠]3mm의 차이가 명장을 만든다

머니투데이 김창익 기자 | 2008.07.01 09:38

②현대重 '3mm맨'..김기탁 기장

편집자주 | 글로벌 최강 기업에는 공통점이 있다. 반드시 명장(名匠)들이 있다. 그들의 '원터치'가 명품을 완성한다. 그들의 섬세한 손끝, 가라앉은 숨결에서 글로벌 최강이 탄생한다. 명장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평생 한우물만 팠다. 그리고 피와 땀, 때론 한을 일에 쏟아부었다. 머니투데이는 창간 7주년을 맞아 특별기획 시리즈 '명장'(名匠)을 통해 한국 경제의 진짜 주역인 명장들의 삶을 조명하고 그들을 키워낸 기업들의 인재 육성 비결도 소개하고자 한다.

'3㎜의 차이가 명장을 만든다.'

세계 최대 선박회사인 현대중공업의 김기탁 기장(51, 사진)은 '3밀리맨'으로 불린다(조선업계에선 사무직 사원에 대비해 기술직 사원을 '기원', 기술직 과장을 '기장'으로 부른다).



2004년 김 기장이 개발한 `노갭(No Gap)용접공법' 때문에 이 별명을 얻었다.
배 안의 배관파이프를 잇는 용접작업에서 그는 간단한 아이디어였지만 생산성을 40%나 높이는 혁신을 이뤄냈다. 그는 파이프를 잇는 용접을 하기 위해 통상 파이프 간격을 3㎜ 띄워놓는 관행에 이의를 제기했다. 굳이 띄워놓울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통상 기술자들은 3㎜ 간격으로 파이프를 띄워놓고 용접해야 파이프 안팎이 고루 용접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용접작업 후 배관 길이가 설계와 맞지 않는 등의 문제가 수반됐다. 그래서 김 기장은 3㎜ 간격을 띄우지 않고도 용접품질을 유지할 수 있는 노갭용접을 고안해 주장했다.

혁신은 순탄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새로운 방식에 거부감을 느낀 용접공들이 김 기장의 노갭용접 제안에 고개를 갸우뚱했고, 사내 용접기술연구소도 "품질저하가 우려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김 기장은 직접 노갭용접 샘플을 만들어 연구소에 X레이검사, 절단검사 등의 품질검사를 의뢰했다. 각종 테스트를 거친 뒤 연구소는 "품질 저하 없이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획기적 방법"이란 결론을 내렸다. 선주들에게 새로운 공법 적용을 설득하는 일도 전적으로 그의 몫이었다. 이듬해 용접협회 주관 춘계학술대회에서 논문도 발표했다.

김 기장은 또 선박의 소화전이 바닷물에 부식돼 못쓰게 될 경우 간단한 부품 교체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고 선실 천장에 노출돼 있는 배관의 보온문제를 시트지로 손쉽게 마감하는 방법 등을 개발, 2006년 노동부가 최고 기능인에게 수여하는 '명장'이란 칭호를 얻었다.

김 기장에게 이런 열정이 어디서 나오느냐고 물었다. 그는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일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정 회장님이 한번 공장에 오셨다 가면 꼭 뭐 하나씩 바뀌었어요. 하루는 회장님이 페인트 창고를 보고 '필요할 때 옆 공장(고려페인트)에 주문해 바로 쓰면 되지 돈 써가며 창고를 왜 지어'라고 불호령을 내려 바로 창고를 철거한 적도 있습니다. 당시 그냥 스쳐지나갈 수 있는 일들이었는데 회장님은 더 좋은 방식을 끊임없이 생각한 겁니다."

김 기장은 1976년 입사했다. 사내 기술연구소 8주 수료 후 그가 처음 맡은 일은 취부였다. 취부란 용접물을 작업하기 좋게 배열하는 작업이다. 2년간 취부와 용접 등 선박 건조의 용접공정을 익힌 뒤 군함을 만드는 특수사업부에 배치돼 치수관리 등 품질관리업무를 담당했다. 치수관리란 설계도면대로 배가 만들어지는지 중량 길이 등의 치수를 검사, 관리하는 작업이다.



요즘엔 컴퓨터로 배를 설계해 공정상 오차가 거의 없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자로 일일이 재고 정육점에서 쓰는 것과 같은 저울로 일일이 달아야 하는 힘든 작업이었다. 특수사업부에서 그가 처음 치수관리를 한 배가 우리나라 최초의 전투구축함인 '울산함'이다.

그 이후 군수지원함, 기뢰부설함, 차세대 구축함, 잠수함인 안중근함 등이 그의 검사를 거쳐 바다로 나갔다. 그만큼 해군 주력 병기의 내부를 속속들이 아는 사람도 없다. 그는 "단순히 배를 만드는 게 아니라 국방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배 만드는 일로 일생을 보냈지만 그의 당초 계획은 건설역군이 되는 것이었다. 울산공고 3학년 때 김 기장은 중동해외기술인력반에 편성돼 졸업과 함께 중동 건설현장에 파견되기로 예정돼 있었다. 경제발전 5개년 계획 하에 당시 박정희 정부가 기술인력 양성을 거세게 몰아붙일 때였다.

하지만 막상 졸업 당시 정부가 군미필자에 대한 해외파견을 줄이면서 김 기장과 동기들은 대거 현대중공업행으로 진로를 바꾸게 됐다.

김 기장은 "중동 건설현장에 3년 갔다오면 집 1채 살 때였다. 어려운 형편에 중동행이 무산되자 좌절도 했다"고 고백했다.


어려운 가정의 6남매 중 맏아들로 동생들 뒷바라지를 위해 일찍이 직업전선에 뛰어들었지만 공부에 대한 열정만큼은 뒤지지 않는 그였다.

"80년대 수입기기를 많이 쓸 때는 수출국 엔지니어가 현대중공업에 파견돼 일했습니다. 선박 추진기관 설계부터 생산관리, 시운전을 혼자 다해내는 영국 GEC알스톰의 한 엔지니어를 보고 나도 공부를 계속한다면 언젠가는 저렇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 기장은 이후 독학으로 배관공학, 유체역학, 기계공학 등을 섭렵했다. 그는 "그때 그 영국 엔지니어의 나이가 불과 스물일곱이었다. 자존심도 많이 상했고, 자극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2003년 주경야독으로 울산과학대를 졸업하고 2006년 2월에는 학점은행제를 통해 기계공학사 학위를 받는 등 일하면서도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2003년에는 기능분야 국내 최고 자격증인 기능장(용접분야)을 획득했고 기술지도사 등 10여개 자격증도 땄다.

김 기장은 요즘 자신이 갖고 있는 노하우를 후배들과 나누는 데 노력하고 있다. 얼마전부터는 퇴근 후 틈나는 대로 모교인 울산공고와 주변 학교들을 찾아 후배들의 실습을 돕고 있다.
 
김 기장은 "우리 땐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며 배웠다. 후배들에게 좀더 쉽게 기술을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며 "사내 기능장회 모임 동료들과 교육청을 찾아 이런 취지를 보다 잘 살릴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학생들이 기술 독일을 가능케 한 최고 기능인, 즉 '마이스터'는 알아도 우리나라에도 그에 못지않은 기술력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요즘 오대양을 누비는 초대형 선박 5척 중 1척은 현대중공업의 울산공장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아마 모를 것입니다. 고급 기술인력을 양성하려면 교육과정의 모델이 될 만한 기능인을 자세히 소개해 학생들이 미래 목표로 삼도록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현대중공업에서 '김기탁 명인'이란 선박건조분야 최고의 기능인이 배출된 것은 '원천기술'과 '생산현장'을 중시하는 사내 전통과 무관치 않다. 고 정주영 창업자가 73년 중공업을 창업할 당시 배 만드는 원천기술을 모두 수입하는 것을 보고 한탄하면서 기술을 중시하던 풍토가 현대중공업의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오랜 작업과정에서 자신만의 용접공법 개발로 '3밀리맨'으로 불리는 김기탁 현대중공업 기장. 이처럼 '김기탁 명인'이란 선박 건조분야 최고 기능인이 배출된 것은 '원천기술'과 '생산현장'을 중시하는 현대중공업의 전통과 무관치 않다. /사진=이명근기자 qwe123@


현대중공업 경영진 대부분이 엔지니어 출신이란 점만 봐도 이같은 전통이 얼마나 뿌리깊게 이어지는지를 알 수 있다.

현대중공업의 수장 민계식 부회장은 미국 MIT공대 출신 해양공학 박사다. 90년 대우조선 전무 당시 고 정 명예회장이 현대중공업 연구소장으로 직접 스카우트했다. 영업을 중시하는 대우의 사풍이 현대중공업의 그것과 사뭇 달랐던 게 엔지니어 출신 민 부회장이 고 정 명예회장의 영입 제안을 수락한 결정적 이유라고 한다. 민 부회장은 80종의 기술보고서와 180편의 논문, 220여건에 달하는 특허를 보유한 조선업계 최고 '기술통'으로 통한다.

현대중공업그룹내 3대 조선계열사 사장을 모두 지낸 최길선 현대중공업 사장은 서울대 조선공학과 출신이다. 조선소 현장에서 36년을 지낸 현장형 CEO다.

본부장도 대부분 공학 전공자. 김광명 해양플랜트사업본부장(서울대 토목공학) 최원길 조선사업본부장(서울대 전기공학) 오병욱 해양사업본부장(한양대 기계공학) 등이 모두 엔지니어 출신이다.

생산현장도 최고 기술인력으로 무장했다. 기공식이 열린 해인 72년부터 현대중공업이 운영한 기술교육원, 82년부터 시작된 사내 기술자격 검정시험, 89년 문을 연 사내기술대학 등이 현장 기술력을 끌어올리는 추진체 역할을 톡톡히 했다.

예컨대 기술연구소에서 배출한 기능인만 지난 30여년간 10만명이 넘는다. 김기탁 기장이 76년 12월 입사해 현대중공업에서 처음 거친 관문도 8개월 간의 기술교육원 교육이었다. 사내 기술대학도 그동안 875명이 거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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