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이재용 전무께

머니투데이 성화용 시장총괄부장 | 2008.06.02 08:15

"다시 새겨보는 湖巖의 運ㆍ鈍ㆍ根"

엊그제 비 오고 바람 불더니 다시 볕이 뜨겁습니다.

비를 피해 우산과 처마를 찾던 사람들이 이젠 볕을 피해 그늘을 찾습니다.

세상 이치가 그런 듯 합니다. 쉬 잊고 쉬 돌아섭니다. 인심난측(人心難測)이니, 변덕인지 무상(無常)인지 모르겠습니다.

한 동안 마음고생 심하셨을 줄 압니다. 이건희 회장의 결단으로 상황은 정리됐지만 그 결과로 이 전무도 뜻밖의 세월을 낯선 노지에서 보내게 됐으니 착잡함이 더할 것입니다.

그 첫발을 곧 내딛는다 들었습니다. 스스로 다스리고 추스리며 앞 일을 준비하시겠지만, 혹시나 하는 걱정에 감히 몇마디 쓴 말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선 삼성 창업주이자 이전무의 선조부이신 호암(湖巖)의 사업력을 돌아봅니다.

호암은 '운(運)', '둔(鈍)', '근(根)'을 얘기했습니다. 사업가로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운이 따라야 하고, 당장 운이 닿지 않으면 우직하게(鈍) 기다릴 줄 알아야 하며, 용케 운이 닿아도 근기(根)가 있어야 내것으로 만든다고 했지요.

'둔(鈍)'은 우직하다는 뜻입니다. 거기에는 세월의 흐름을 참고 기다린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실 호암을 대사업가로 만든건 '둔의 세월'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호암은 만 스물일곱 나이에 김해평야의 200만평을 사들여 말그대로 만석꾼, 소출 1만섬의 대지주가 됐습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터지고 은행대출이 막히면서 모든 사업을 접어야 했습니다.

서른도 안된 나이에 '산하(山河)로써 경계(境界)를 삼았던' 대지주 호암은 그 젊은 나이에도 침착하게 실패를 받아들였습니다. 이게 바로 땅부자가 된 수완보다 훨씬 더 무거운 사업가로서의 자질이었습니다.


경영하던 정미소와 운수업체를 넘기고 땅을 모두 팔아 은행 빚을 갚은 후 남은 건 약간의 전답과 현금 2만원. 호암은 모든 걸 원점으로 돌린 채 대륙으로 여행을 떠나며 재기를 꿈꿉니다. 그 때 훌훌 털고 필마단기로 중국행을 선택한 호암을 이전무의 현재에 대입하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요.

호암의 젊은 시절 또 한번 '기다림의 세월'이 있었습니다. 30대 초반 양조장과 삼성상회가 한창 번성할 때 돌연 사업을 지배인에게 맡기고 고향인 중교리로 낙향한 것입니다. 해방 때 까지 3년여를 고향에서 지낸 것은 태평양 전쟁 말기의 흉험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사업을 소개(疎開)하면서 까지 선택한 기다림. 그러고 보니 '우직함'의 이면에는 '냉정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건희 회장의 이번 결단은 호암의 낙향과 닮은 꼴입니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어떤 변수가 등장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그 이후의 사건 전개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호암은 시류의 흐름을 읽고 냉정하게 분석해 물러설 줄 알았습니다.

이전무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덕목도 이와 같습니다. 묵묵이 '내 짐'으로 인정해 등에 얹고 먼 길 돌아가겠다 각오하고 나면 오히려 홀가분하게 '운'을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바탕 불어닥친 거센 바람 끝에 모든 게 달라진 듯 보이지만, 실제로 달라진 게 무언지 들여다 보면 또한 짚어내기 막막합니다.

다만 최근 몇 년의 질곡이 몇가지 교훈으로 새겨졌을 뿐 입니다. 돈으로 화해를 살 수는 없고, 기업은 경영으로 말한다는 것. 결국 세대를 뛰어 넘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실현만이 해법이라는 것.

삼성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이전무는 지금 어디에 서있습니까. 부디 긴 호흡으로 멀리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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