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우병보다 더 무서운 것

뉴욕=김준형 특파원 | 2008.05.12 14:44

[김준형의 뉴욕리포트]

미국 식료품점의 고기 포장에 소의 연령이 적혀 있는 걸 본적은 없다.
집 근처 대형 식품점 정육코너 책임자는 "박스에 찍힌 검인을 통해 연령을 확인하고 20개월 안팎짜리만 들여온다"며 "문제가 될 고기를 팔았다간 끝장"이라고 말했다.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20개월짜리 쇠고기만 먹는다'는 말은 맞긴 맞는 셈이다.

20개월인지 30개월인지 일일이 뒤져가며 먹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음식이라면 차라리 끊는게 낫지 않을까 생각도 든다.
개인적으론, 한 1년정도 '포유류'를 거의 먹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뱃살의 압박도 컸지만, 자궁에서 몇달씩 키우고 산고를 겪어가며 낳은 생명체를 잡아먹는다는게 영 꺼림칙하기도 했다. 제프리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같은 책의 울림도 컸다. 이순신이 왜적에게 아들을 잃은뒤 포유류의 역한 비린내를 견디기 힘들었다고 묘사한 소설 '칼의 노래' 대목이 자꾸 걸렸던 것도 그때쯤이었던것 같다.

뉴욕에 나와서는 '언제 그랬냐'가 됐다. 20달러정도면 네 식구가 충분히 먹을수 있을 정도로 값이 싸다는게 제일 큰 이유다. '애들이 단백질을 섭취해야 한다' '음식에 익숙해지지 않고서는 이 나라를 이해할수 없다'는 등등 핑계가 동원된다.

육식습성을 끊을수 없다면 쇠고기 수입은 '허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환영'해야 하는게 소비자들의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생각이다.
음식점에서 1인분에 4만원, 5만원까지 넘어가는 한우는 보통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렵게 된지 오래다. 산지 소값이 아무리 떨어져도 내려가는 법이 없는 '오만한' 고깃값은 질좋은 수입 고기로 '응징'할수밖에 없다.

축산농가에는 미안한 말이지만, 식용 소사육은 워낙 비용이 많이 들고 환경오염이 뒤따르는 '고비용 공해업종' 이라 한국의 좁은 땅덩어리에는 맞지 않는다. 잊을만 하면 일어나는 먹거리 파동을 대할때면 한우가 수입쇠고기보다 더 안전할거라는 믿음도 흔들린다.

이처럼 쇠고기 수입을 적극 지지할수 있는 것은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해야 할 조치는 취해놓고, 들여올 것만 들여온다는 전제가 깔려 있을때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타결 내용을 보면 그게 아닌 듯하다.
소비자인 국민들이 싫다는데도 30개월 미만 소의 '광우병 특정 위험물질(SRM)까지 수입하면서 '판단은 소비자의 몫'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정작 '연령표시'같은 판단의 기준은 소홀하기 그지 없다.

미국에선 소화하기 힘든 30개월 이상된 소의 고기나 부산물이 한국에선 돈이 되기 때문에 미국 업체들이 군침을 흘리는데도 '어차피 미국에서 30개월 이상 소가 안 팔리니 한국에도 거의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앞뒤가 바뀐 것이다.

몇달전까지 자신들이 내세웠던 논리도 바꾸는 '영혼없는' 공무원들의 모습은 가관이다. 지난달 이뤄진 미국의 '동물성 사료 금지 조치 강화' 공고 내용에 대해서는 정부가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는 논란마저 일고 있으니 갈수록 태산이다.

지난달 조지 W부시 미 대통령과의 회담에 앞서 이곳 뉴욕을 먼저 찾은 이명박 대통령은 한껏 고무된 표정이 역력했다. 청와대 대변인 말마따나 미 관리들과 기업 관계자들이 '옛친구가 돌아온것처럼' 반겨줬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래서 정상회담을 앞두고 정부가 '통크게' 협상을 마무리했는지는 모르겠다.

국민들이 국가권력에게 신탁해놓은 안전과 생명은 정부가 그렇게 가볍게 저울질할 대상이 아니다.
광우병에 걸려 죽을 확률이야 벼락맞을 확률보다 적을 수 있다. 그보다는 국가권력이 앞으로도 이런식의 위험한 거래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더 섬짓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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