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작가 박경리 "참 홀가분하게" 잠들다

머니투데이 박종진 기자 | 2008.05.05 15:49
한국문학의 기념비 '토지'의 작가 박경리씨가 5일 오후 2시45분쯤 폐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82세.

박씨는 지난해 7월 폐암선고를 받았으나 고령을 이유로 항암 치료를 거부해오다 지난달 4일 뇌졸중 증세로 쓰러져 현대아산병원 응급실을 통해 입원했다.

중환자실과 집중치료실 등을 오가며 치료를 받아오던 박씨는 지난달 23일부터는 가족들의 요청으로 일반병실로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난달 말 한때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후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치료를 받다 결국 이날 숨을 거뒀다.

박씨는 1926년 10월 경남 통영에서 출생했으며 1955년에 월간문예지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을 발표하며 등단한 이래 53년간 글을 썼다.

사이가 좋지 않은 부모 밑에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박씨는 한국전쟁 때 남편과 아들을 잃은 슬픔을 겪었다.

박씨는 그 시간들을 다 이기고 '김약국의 딸들', '파시', '시장과 전장' 등 굵직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1969년부터 26년에 걸쳐 완성한 5부작 대하소설 '토지'는 원고지 4만장 분량에 3번에 걸쳐 드라마화되기도 한 현대문학사의 기념비다.

올해 월간 현대문학 4월 호에 그가 마지막으로 발표한 신작시 3편에는 작가의 성찰과 회한도 묻어났다.

"모진 세월 가고 /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옛날의 그 집' 중)

자신의 운명을 가늠한 듯 그렇게 현대 문학의 거목은 마지막 작품들에서 "홀가분함"을 노래했다.

박씨는 1950년 남편 김행도(金幸道)씨와 사별했으며 유족으로는 외동딸인 김영주(62) 토지문화관장과 사위 김지하(67) 시인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으며 장례는 문인장으로 치러진다. 발인은 9일, 장지는 경남 통영 미륵산 기슭이다. (02)3010-2631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2008년 4월 '현대문학'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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