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몸살 풀기에 제격인 술과 음식

전두환 신한카드 부사장 | 2008.04.28 14:45

[머니위크]전두환의 '나의 와인스토리'

3월 중순이 채 되기도 전에 마당의 황매화 줄기가 푸르스름해지고 벚나무 잔가지에 물기가 스며들기 시작한다. 봄이 오는 낌새에 나는 온몸이 간질간질해 진다. 특히 목젖부근이 근지러워지며 자주 침을 삼키게 된다. 끊은 지 만 10년이 지난 담배 한대 생각이 난다. 겨우내 옴츠렸던 몸이 일조량이 늘어나면서 식물들과 마찬가지로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다.

허허로운 생각을 떨치려고 마당 잔디에 잡초를 꼼꼼히 뽑는다. 지난주 마당 구석자리에 꽃나무를 심으려다 가운데 손가락 굵기만 한 더덕 20여 뿌리를 캐는 횡재를 했다. 집사람과 나는 논의 끝에 반은 맛보고 나머지는 다시 심어 불리기로 했다.

이 조그만 마당에도 우리 모르게 숨겨진 보물이 있다니 즐겁고 신기하다. 야생 더덕은 줄기나 뿌리를 건드리면 그 향이 사방 십리에 퍼지는 듯하다. 어제 저녁식사 때 매콤한 더덕 무침을 먹고 나니 헛헛하던 속이 편안해 진다.

비즈니스로 참 많은 거래처를 만나고 때로는 사람에 치여 마음의 상처를 받고 은퇴할 날을 손꼽지만 멋진 순간들도 못지않게 많다. 만난기간은 짧지만 오랜 친구 같은 거래처로부터 반가운 연락이 왔다. 4월의 제철 음식 주꾸미를 먹으로 가잔다.

나는 거래처와의 식사약속이 되면 어떤 술을 반주로 할 것인지를 미리 생각한다. 술만 마시기보다는 술 자체를 따로 음미하고 이야기 거리가 많은 식중주는 비즈니스를 위한 대화를 한층 더 풍성하고 여유롭게 한다. 아울러 식욕과 음식 맛을 돋우어 준다.

그 술이 와인으로 결정되면 그날 음식과의 매칭, 지역, 가격 등을 참작하여 마실 와인을 고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상대방의 기호를 고려해야 한다. 오늘의 메뉴는 양념 주꾸미 석쇠구이 그리고 평소 소주를 즐겨하는 분들을 위하여 이강주를 선택했다.

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 의하면 평양의 감홍로, 정읍의 죽력고와 더불어 전주의 이강고를 조선의 3대 명주로 꼽았다. 이강고를 계승한 이강주는 배 즙에 계피, 생강과 한약재로 쓰이는 울금을 넣어 만든다. 배의 청량감과 생강의 톡 쏘는 향, 계피 향이 어우러지는 문화재급 술이다.


부천의 GS백화점 건너편 음식점골목에 용궁별미 양념주꾸미 석쇠구이집이 있다. 봄 주꾸미는 3월에서 5월까지 산란기여서 살이 쫄깃쫄깃 해지고 알이 통통하게 배여 있다. 갖은 양념이 된 주꾸미를 석쇠에 올려, 살짝 구어 바로 입에 넣는다. 부드러운 살과 맵지 않고 새콤달콤한 주꾸미 한 마리에 이강주 한 모금이면 금상첨화다.

다음은 주꾸미 샤브샤브를 내놓는다. 타원형 머리(?)부분을 지긋이 깨물면 잘 삶아진 계란 같이 말랑말랑한 껍질이 부서지고 가득찬 알들이 더욱 부드럽게 와 닿는다. 한알 한알 씹히며 터지는 느낌이 알마다 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먹물이 들어가 검어진 국물을 한 모금 떠먹으면 짭조름한 바다의 내음이 풍겨진다.

매화꽃이 피고 튜울립의 구근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려고 고개를 내밀 때쯤이면 나는 삼동 겨울을 무사히 잘 보내고도 항상 이 봄이 오는 고개에 주저앉고 만다. 해마다 오는 나의 봄 몸살은 이번 주말경이면 끝날 것이다.

난리통에 태어나 그러잖아도 어려운 보리고개를 넘느라 내 DNA가 이 시기엔 가만히 주저앉아 봄꽃과 나무들이 땅을 뚫기 위해 몸부림치는 소리를 들으며 기다리도록 변형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어제 저녁 나는 아내에게 얼큰한 대구지방에서 먹는 소고기국을 부탁했다. 아들이 부대껴하면 어머니께서는 이 국을 끓이시곤 했다. 얼큰하면서도 말린 토란줄기의 단맛과 듬뿍 넣은 무우의 시원함으로 내 몸은 가뜬해 진다.

식탐을 해 여러 마리째 주꾸미 샤브샤브를 먹던 날, 문득 텁텁함을 해소할 산뜻한 쇼비뇽 블랑 한 잔이 생각났지만 밤늦게 집으로 오던 도중 나는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 이 잔인한 봄철의 액땜으로는 역시 이 땅의 제철음식과 술이 아니면 어려울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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