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회장의 분노' 현대상선 스톡옵션파동 전말

머니투데이 이승제 기자 | 2008.04.15 15:46
#노정익 사장의 자신감

2004년 가을 어느날 저녁. 서울 시내 한 음식점. 노정익 당시 현대상선 사장은 특유의 경영철학을 설명하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노 사장은 "현대그룹은 이제 완전히 전문경영인(CEO) 체제로 작동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KCC와의) 경영권 분쟁도 마무리됐으니, 현정은 회장 체제가 자리잡은 것 아니냐'는 물음에 대해 화두를 돌려 답했다.

'그래도 그룹은 회장 중심으로 최종 의사결정을 하지 않냐'는 후속 물음에 노 사장은 "(현대그룹의 경영 시스템과 지배구조는) 회장이 무슨 특별한 일을 하는 시스템이 아니다"고 일축했다.

'지나치게 강한 발언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스쳐갔지만 자신감과 의욕을 보이는 노 사장을 지나치게 다그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자리를 마치고 나올 때 홍보 임원은 슬그머니 기자 옷소매를 잡아 당기며 눈짓을 건넸다. "사장님이 오늘 조금 취하신 듯 하니 발언한 내용에 그다지 신경쓰지 말아달라"고 했다. 술과 자족감에 적당히 취한 노 사장은 유쾌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노정익 전 사장은 한때 현대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현대상선을 이끌며 '전문경영인 시대'를 여는 듯 했다. 하지만 현 회장이 친정체제를 본격적으로 구축하는 과정에서 결국 물러나게 된다.
#음모론…배반과 복귀
그보다 앞선 2004년 1월 전후. 현대그룹의 지주회사격인 현대엘리베이터에 대해 적대적 인수·합병(M&A)를 시도했던 KCC측은 현대그룹 내부를 뒤흔드는 교란전략을 펼쳤다. 현대그룹에 대한 공격 명분으로 현대가(現代家) 재건과 현대 붕괴의 원인인 가신그룹 청산을 내세웠고, 특히 가신그룹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뒤 맹공을 퍼부었다.

KCC는 특히 공식적으로 언론에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노정익 현대상선 사장 등을 두고 '반란 시도' 혐의를 제기했다. 현대그룹의 내부 분열을 조장하기 위한 꼼수였다. 혐의는 충분했다. 당시 노 사장은 배반을 시도했었고, KCC는 현대그룹의 주력 계열사를 이끄는 노 사장을 거의 품에 껴안을 뻔 했다.

노 사장은 현정은 회장측이 KCC의 기습공격에 맥을 못추자 KCC측에 '러브콜'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대그룹측은 '유상증자를 통한 국민기업화'라는 묘수를 뽑아들었고 또 사장단 일괄사표 제출, 재신임 과정을 거쳐 전열을 신속하게 가다듬었다.

이에 노 사장은 불과 2, 3일 사이로 다시 현대그룹측을 선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그룹 입장에서 최대 계열사인 현대상선을 이끌고 있는 핵심 장수를 잃을 뻔 했으나 가까스로 추스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노 사장의 '충성심'에 대해서는 그룹 안팎에서 끊임없이 의혹이 제기됐다. 현 회장은 현실론을 앞세워 이를 무마했지만 속마음까지 평온할 수는 없었다.

#이익 앞엔 명분도 필요 없다(?)


다시 시간을 돌려 2003년 8월 11일. 당시 현대상선 정기이사회는 경영진 34명에게 총 90만5000주(전체 발행주식의 0.88%)에 달하는 주식매수선택권(스톡옵션)을 부여하기로 결의했다. 노 사장은 20만주를 받았다.

이날은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영결식이 있은 지 불과 사흘 뒤였다. 그룹 안팎에선 향후 경영권과 지배구조 향방을 놓고 각종 의혹과 전망이 나오던, 그야말로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시기였다.

그룹의 강력한 결집력으로 작용하던 '주군(主君)'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누가 새로운 주군이 될 것인가. 현정은 회장은 이때부터 석달 뒤인 10월에야 회장으로 취임한다.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남겨진 장수'들은 "일단 내몫부터 챙겨보자"는 이기심에 쉽게 굴복했을 것이다. 견제하는 사람도 없었고, 드러내놓고 탓하는 이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를 승인하고 허락해 줄 '주군'이 없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남편인 고 정몽헌 회장의 상중에 시숙인 정상영 KCC 명예회장의 기습 공격을 겪으며 그의 내공은 착실히 다져졌다. 현 회장은 은근과 끈기를 무기로 기어이 그룹의 지배구조를 자신의 의도에 따라 변모시켰다.
#응징이냐, 팽이냐

노정익 전 사장은 당초 현대상선 구원의 특명을 띠고 고 정몽헌 회장에 의해 전격 기용됐다. 고 정 회장은 2000년 이른바 '왕자의 난' 이후 경영일선을 떠났다가 현대엘리베이터를 장악하면서 경영일선에 재등장했다. 이어 현대구조조정본부 부사장, 현대캐피탈 부사장 등을 역임한 노정익 사장을 전격 기용해 본격적인 재기의 한 축으로 활용하려 했다.

노 사장은 취임 초기 단행한 인사 등에서 잡음을 노출하기도 했지만 이후 그의 경영 및 비전수행 능력은 합격점을 받았다. 그를 전문경영인으로 선택한 정 회장의 안목이 돋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결국 정 회장은 노 사장에 배신을 당했다는 게 현대그룹 안팎의 시각이다. 현대그룹 한 관계자는 이렇게 전한다.

"고 정몽헌 회장은 뛰어난 능력과 자질, 겸손하고 소박한 생활태도 등을 갖춰 총수로서 손색없었다. 하지만 유난히 사람을 제대로 가려쓰지 못했다. 속내를 정확히 판단하지 못했고, 지나치게 쉽게 믿음과 신뢰를 줬다. 이익치 회장 등 가신들 때문에 그렇게 고생했음에도 여전했다. 정 회장은 너무 사람을 잘 믿었다. 그가 조금만 더 신중하게 사람을 썼다면 그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지 모른다."

현대상선이 최근 노 전 사장 등에 부여했던 스톡옵션의 무효처리하겠다고 나선 배경에는 현 회장의 마음이 실려 있다는 게 현대그룹 안팎의 분석이다. 정관 위배와 시기를 문제삼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노 전 사장에 대한 원망과 부정적인 판단이 핵심 이유라는 얘기다. 노 전 사장에게 80억원이 넘는 이득을 순순히 내줄 수 없다는 현 회장의 의지가 작용했다는 것.

이 사건을 바라보는 업계의 시선은 그러나 다소 얄궂다. 둘다 잘했고, 동시에 못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재계 한 관계자는 "현 회장 입장에서 스톡옵션을 줄 수 없는 것은 어찌보면 상식에 가깝다"면서도 "하지만 노 전 사장은 과오야 어떻든 현대상선을 잘 이끌며 공을 세웠는데, 결국 이처럼 '팽' 당하는 것을 보니 전문경영인의 전형적인 최후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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