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면 말고式' 시한없는 약가협상

이기형 기자, 신수영 기자 | 2008.04.01 09:36

예측불가 약가결정 시스템<상>

편집자주 | 약값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일반인들이 약값 결정 메카니즘을 알기는 쉽지 않다. 매우 전문적인 영역이니 그만큼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용이 어려운 것은 이해가 되는데, 절차가 어렵고, 과정이 뒤죽박죽이어서 어렵다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최근 논란이 일으키고 있는 다국적제약사의 신약 보험등재 과정속으로 들어가봤다.[편집자주]

"가격이 안맞아 안 팔겠다고 하니 우리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가격만 깎을 수 있다면 (규정된 시한이 지났어도) 얼마든지 질질 끌어도 된다. 버틸때까지 버텨보자."

로슈의 에이즈치료제 '푸제온'이 시판허가를 받은 것은 2004년이다. 하지만 지금도 판매되지 않고 있다. 필수의약품으로 보험등재 결정이 났지만 약가가 맞지 않아 로슈측에서 아예 판매하지 않고 있다. 추가로 가격협상에 나설 기미도 없다. 이제 몸이 단 것은 보건당국이다. 환자들은 생사를 넘나들고 있다.

브리스톨-마이어스스퀴브(BMS)의 백혈병 치료제 '스프라이셀'은 이와는 상반된 케이스다. 지난해초 시판허가를 받고 보험등재에 나섰지만 건보와의 가격협상 결렬로 약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시판허가를 받은지 14개월이 지났다. 기존 약값에 비해 싼데다 가격을 더 낮출 의사가 있다는 게 제약사측의 입장이지만 언제 약가가 결정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약제적정화방안 시행이후 약을 하나 런칭하는데 상당히 '어려운' 과정을 거치고 있다. 문제는 이 과정을 통과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갈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다. 일관성, 합리성의 부재로 건강보험 약제 등재가 혼선을 빚고 있다. 약을 팔아야 하는 제약사나 약을 기다리는 환자는 물론 보건당국조차도 헷갈리고 있다.

새 약가제도 시행이후 첫 필수의약품 등재절차를 밟고 있는 '스프라이셀'을 보면 그 실상을 가늠할 수 있다. 스프라이셀이 시판허가를 받은 것은 지난해 1월25일이다. 그로부터 한달여가 지난 3월12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보험등재를 신청했다. 2차례의 암질환 심의위원회, 혈액암 등 관련전문가 회의를 거쳐 7월20일 심평원 약제급여평가위원회에서 '급여' 의약품 판정을 받았다. 이 경우 건보공단과 약가협상에 나서면 되는데 복지부에서 제동을 걸었다. 급성림프모구성 백혈병(ALL) 급여여부와 만성골수성백혈암(CML) 내성환자에 대한 필수의약품 의견이 적정한지 다시 심사하라는 지시였다.

처음부터 다시 평가를 받아 '급여' 여부를 판정받아야 했다. 이에따라 10월2일 다시 혈액암 등 전문가회의가 열렸고, 같은달 10일에는 암질환심의위원회 3차 회의가 열렸다. 의견은 전과 동일했다. 같은달 19일 심평원은 다시 '급여' 판정을 내렸다. 이로부터 한달쯤 뒤인 11월15일 건보공단과 약가협상에 들어갔으나 3차례의 협상에도 불구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올해 1월19일 협상결렬이 통보됐다.

필수의약품의 경우 협상이 결렬되면 복지부가 조정에 나서 60일이내에 약가를 고시토록 돼 있다. 이른바 직권등재다. 복지부는 1월25일 심평원에 필수의약품 여부를 재검토토록 했다. 스프라이셀은 2월5일 4차 암질환 심의위원회에서 거쳐 필수의약품으로 재통과됐다. 약가조정위가 열린 것은 협상결렬 통보후 거의 2달이 다 돼가는 3월14일. 뒤늦게 열린 조정위에서는 제일 먼저 결정한 것은 '(60일)기한규정은 강제규정이 아니라 훈시규정이니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일단 책임에서 벗어난 조정위는 이렇다할 조정행위에 들어가지도 못한채 회의를 끝마쳤다.


여기에는 때마침 자질 논란끝에 가까스로 임명된 김성이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이 취임하자마자 불란을 일으킬 소지를 줄이자는 '정치적인 이유'까지 가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제는 이같은 예측불가 약제등재 시스템이 다국적 제약사와의 가격싸움에서 우리 당국이 전혀 밀리지 않고 잘 싸우고 있다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보니 일단 결정을 미루고 버티기만 하면 책임도 자연스럽게 미뤄지는 분위기다. 결정이 지연됨에 따라 발생하는 경제적 기회비용에 대해 고려치 않는, 새 문제만 일으키지 않으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고가논란이나 다국적 제약사의 횡포논란을 차치하고 건보등재 시스템에서 불합리한 요소를 제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약제의 보험등재 결정은 심평원에서 하고, 약가결정은 건보공단에서 하는 방식도 많은 지적을 받는 요소중 하나다. 심평원의 약제급여평가위에서 내린 평가를 토대로 가격협상에 나서는 건보공단은 일단 깎고보자는 가격위주의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구조라는 얘기다.

규정된 시한에 관계없이 깎을 데까지 깎아보고, 안 깎아져서 협상이 완전히 결렬되면 아예 약값이 안나가게 되니 건보공단으로선 최고의 재정절감을 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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