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가슴으로 담아낸 현실의 예술

박정수 연일아트 대표 | 2008.03.18 17:12

[머니위크]미술품 투자와 감상법 '사진'

"에이, 말도 안 돼. 사진을 누가 사! 자꾸자꾸 계속 인화해서 팔아도 되는 거 아닌가?” “한 점만 파는 것도 아닌데 가격 오르겠어?”

주변을 둘러보라. 초등학생까지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무엇인가를 찍어댄다. 사진이나 영상 이미지들이 인터넷을 떠다닌다. 이미지 홍수 시대이다. 문자에 의해 지식을 전달받는 것 보다는 영상이나 이미지에 의해 지식을 전달 받는 시대가 되었다. 기계문명의 발달로 아주 쉽게 접근하는 사진이기 때문에 ‘단 하나만’을 유달리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사진은 구매의 관점에서 잘 선호하지 않는다. 인쇄하거나 인화하면 여러 점이 된다는 사실에 달갑지 않기 때문이다.

3~4년 전만 하더라도 사진은 미술투자의 시각에서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하였지만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사진은 회화와 마찬가지로 시각적 표현 매체이면서 현실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예술 장르임을 인정하고 있다. 2007년 소더비경매에서 배병우 작가의 사진작품이 1억원 이상에 낙찰된 바 있다. 4년 전에 비해 10배 이상 오른 가격이다.

사진술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 화가와 예술 애호가들은 사진술의 발명에 열광하기도 하였으나 인물을 그리거나 사회의 어떠한 사건을 그림으로 그리던 시대에 사진의 출현은 일시적으로 화가들에게 많은 혼란을 제공하였다.

프랑스의 화가 들라로슈(Paul Delaroche, 1797-1856)는 사진에 대해 ‘이제는 회화는 죽었다’라고 할 정도로 충격적인 상황으로 받아들였다. 당시의 현실로 본다면 사회적 지위를 말하는 초상화나 기록화 같은 것들이 사진으로 옮겨가게 되면 화가의 일감이 없어질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한편으로 세잔이나 드가, 피카소와 로트렉 등의 화가들은 사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성공한 화가로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사회적 신분차이에 비싼 가격의 초상화를 제작하지 못하던 시절의 사진 발명은 대중들의 기호에 대대적인 환영을 받게 됨은 두말할 나위 없다.


우리나라에서의 사진은 1871년 신미양요 이후 도입되었는데 조선후기의 문인화가였던 지운영(池雲英 1852~1935)이 사진관을 세워 1884년에는 고종의 초상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되면서 보도사진이 시작되었고 여수, 순천 반란사건을 찍은 이경모(李坰謨 1926~2000)의 도큐먼트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시초가 되었다.

1960년대 이후에는 주명덕과 같은 사진예술가들이 등장하여 한국성 혹은 전통적인 소재를 발현시켰으며 80년대의 컬러사진과 사진기의 일반적인 보급으로 상업사진이 활성화 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세철의 사진 ‘블랙 시티’는 사회현상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추구하지 않는다. 벽과 골목길의 중첩된 이미지 속에 담겨진 담담한 현실에 대한 바라봄이며 사람을 에워싼 환경 변화에 민감한 반응이 따를 뿐이다. 여기에 카메라 렌즈와 피사체가 가진 시간이 있다. 생성되고 소멸되는 시공간적 상황을 담담하게 지켜본다.
오세철, Black City, 24″×30″, Gellatin Silver Print, 2007

이 기사의 관련기사

베스트 클릭

  1. 1 "네 남편이 나 사랑한대" 친구의 말…두 달 만에 끝난 '불같은' 사랑 [이혼챗봇]
  2. 2 노동교화형은 커녕…'신유빈과 셀카' 북한 탁구 선수들 '깜짝근황'
  3. 3 "바닥엔 바퀴벌레 수천마리…죽은 개들 쏟아져" 가정집서 무슨 일이
  4. 4 "곽튜브가 친구 물건 훔쳐" 학폭 이유 반전(?)…동창 폭로 나왔다
  5. 5 "남기면 아깝잖아" 사과·배 갈아서 벌컥벌컥…건강에 오히려 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