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는 과연 '빨갱이'일까

머니투데이 박창욱 기자 | 2008.02.27 12:32

[일상속에서]'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해

# 1.
최근 어느 시민단체 출신인 경제 전문가에게 한 최고경영자(CEO) 토론회에 참석했던 이야기를 들었다.

그 모임은 모 재벌그룹 경제연구소의 임원을 강사로 모셔 최근 기업환경의 변화에 대한 강연을 듣고 토론하는 자리였다.

심도깊은 토론과 시사적인 의견이 오고 갔다. 이 시민단체 출신 인사는 강연자의 신분을 감안, 강연자가 속한 그룹의 '경영권 후계 구도가 잘 이뤄질 것인지'에 대한 전망을 물었다. 강연자는 무난하게 '잘 될 것'이라며 신중한 답변으로 넘어갔지만, 사단은 정작 다른 곳에서 났다.

참가자 가운데 중견기업의 60대 오너경영자 한 분이 '무슨 좌파 빨갱이 같은 소리냐'며 역정을 냈던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식에게 물려줄 재미로 기업하는 거지, 자식 안 줄거면 뭐하러 새벽부터 밤까지 그 고생을 하느냐"는 일갈이었다.

이 발언에 대한 동조자가 늘면서 토론회의 분위기가 살벌해졌다고 한다. 그 오너경영자는 영 분을 삭이지 못하고 다시는 이 토론회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

# 2.
"부자들은 사회에 특별한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상속세를 내야 한다."
"부자들의 부는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의 강력한 지지없이는 불가능하다."
과연 누구의 말일까. 어느 좌파 정치가나 학자인 듯도 하다.

이 사람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 "내가 기부를 많이 하는 이유는 나와 우리 가족들이 이 사회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쯤 되면 눈치 채는 분들이 나올 것 같다. 주인공은 바로 빌 게이츠다. 세계 최고의 부자인 그는 자본주의의 중심부인 미국에서 자신의 힘으로 성공한 기업인이다.


빌 게이츠는 최근 "불평등 해소를 위해 빈민들을 위한 사업을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펼쳐야 한다"며 '창조적 자본주의'를 제창하기도 했다. 그는 재산 가운데 1%도 안 되는 금액(워낙 재산이 많다보니 그래도 엄청나다!)만 자식에게 물려주고, 재산의 대부분을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한 재단에 기부해버렸다.

# 3.
과거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일을 보면, '윤리적'인 것과 '이념지향적'인 것이 구분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 술 더 떠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념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일도 잦았다. 예전 독재 정권 시절에 정치적 반대파들을 실제 여부와 상관없이 '빨갱이'로 몰아 처단했던 일이 대표적이다.

민주화로 인해 지금 그런 일은 없어 졌지만, 그 같은 방식은 정치외에 다른 곳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예를 들어 보자. 재벌가의 '세금 제대로 내지 않는 편법적인 기업 경영권 승계'에 반대하면, 기업을 싫어한다는 '반기업 정서'의 굴레가 덧씌워진다. 이와함께 '좌파' 혹은 '빨갱이'라는 눈흘김도 함께 당한다.

재산이 많으니 세금 제대로 내라고 해도 마찬가지 비난을 받기 일쑤다. 또 한 방송사가 일부 교회의 교회 운영권 세습 의혹 등을 제기하자, 해당 목회자가 해당 방송사에 대해 '거긴 빨갱이가 많아서 교회를 핍박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교회 운영을 투명하게 하라는 주장이 왜 '빨갱이'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하는 건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도리가 없다.

#4.
이렇듯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책임이나 질서, 정의 등을 지키는 일을 강조하면, 이내 그 주장은 '좌파적'인 것이 되고 곧 사회의 양적발전을 저해하는 '빨갱이'스런 행동으로 치부되곤 한다. 물론 한 여권 인사의 말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산이 많은 것은 분명 죄가 아니다.

하지만, 그 재산의 형성 과정이 사회적 상식과 법에 맞아야 하고 재산에 대해 성실하게 납세도 해야 한다. 그렇지 못했다면 어떤 형태든 분명 '죄'를 짓는 일이고, 당연히 도의적이거나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런 책임을 묻는 일은 분명 '빨갱이' 짓이 아니다.

오히려 지도층의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정신은 보수 사회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다.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세금 잘 내야 한다고 하고, 기부하면서 자식에게 회사 상속 안 해주고, 없는 이를 위해야 한다는 미국의 기업인 빌 게이츠. 그는 과연 '빨갱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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