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은 돈으로 행복한 노후 설계하기

대전=이경숙 기자 | 2008.02.06 15:36

[쿨머니, 행복공식 다시 쓰기]<5-1>한밭레츠 맥가이버 이야기

↑한밭레츠의 김성훈 대외협력실장(사진 왼쪽의 서있는 이)이 회원들에게 '품앗이놀이'를 설명하고 있다. '품앗이놀이'는 포스트잇에 '제공할 것'과 '요청할 것'을 각각 써서 서로 교환하면서 레츠의 원리를 익힌다.

"나한테 1원만 줘요, 하면 줄 수 있어요? 없어요? 대한민국 사람들이 1원씩은 줄 수 있을 것 아냐. 그러면 얼마야. 5000만원은 모이지?"

대전시 법동의 한밭레츠(LETs, Local Exchange Trading System) 사무실. 이 지역 '맥가이버' 이규영 할아버지(73)가 박현숙 두루지기(레츠관리실무자)한테 자신의 새로운 구상을 열심히 설명한다.

한밭레츠 2008년 정기총회를 앞두고 밀린 일이 산더미 같이 느껴지는 박씨. 눈은 컴퓨터 모니터에 가있고 손가락은 자판을 쉼 없이 두드린다. 그러면서도 박씨는 맥가이버의 말에 연신 싱글벙글하며 "예, 예" 맞장구를 쳐준다.

얼마 전 그는 맥가이버한테 신세를 진 적이 있다. 아이가 방문을 잘못 잠궈 발을 동동 구르던 때였다. 맥가이버는 전화 한 통에 달려와 고장난 문을 고쳐줬다.

집안에서 생긴 이런저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며 일머리를 익힌 맥가이버는 전기전자제품 수리부터 배관공사까지 척척해내는 '만물박사'다. 서점을 운영했다는 전직이 의심스러울 지경으로.
↑'한밭레츠'에서 '맥가이버'로
통하는 이규영(73) 할아버지는
99년 한 지역신문에서 한밭레츠
창립 소식을 듣고는 바로
달려와 회원으로 가입했다.


박씨는 고마운 마음에 재료비 빼고 1만 두루(한밭레츠 단위)를 맥가이버에게 선사했다. 많은 회원이 이런 식으로 신세를 갚았다. 맥가이버는 어느새 레츠 부자가 됐다. 레츠와 정부의 노인일자리 수입으로 그와 부인은 얼굴 구길 필요 없이 잘 산다.

70대인 맥가이버는 레츠를 병원에서 가장 많이 쓴다. 민들레의료생협이 운영하는 치과, 의원, 한의원에선 의료보험 해당항목에 한해 레츠를 현금처럼 받는다. 한밭레츠 회원인 두레약국도 의료보험적용약품 1항목당 1500두루까지 레츠를 받아준다.

레츠를 받은 민들레의료생협, 두레약국, 한밭레츠 사무국은 직원 월급 일부를 레츠로 준다. 민들레의료생협은 지난해 1800만 두루를 받고도 1000만 두루가 '마이너스'다. 직원 퇴직금으로 600만 두루가 한꺼번에 나간 탓이다.

직원들한테도 레츠는 쓸모가 많다. 3000두루에 1만원을 보태면 햇멥쌀 4킬로들이를 살 수 있다. 회원들이 내놓은 아기옷, 전기장판 따위 교환품목은 현금 없이 레츠만으로도 구입할 수 있다.

심지어 레츠로 급전을 구해 쓰기도 한다. 어떤 회원은 이자 일부를 레츠로 주겠다고 온라인게시판에 공고를 냈다. 전세자금 5000만원이 2주만에 모였다.

비결은 신뢰. 오랫동안 레츠를 거래하며 쌓인 신뢰가 없었다면 다른 회원들이 돈을 꿔주지 않았을 것이다.

김성훈 한밭레츠 대외협력실장은 "돈의 본질은 약속이자 관계"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물건을 살 땐 우리는 거기에 들어 있는 자원과 노동을 사는 것"이라며 "이러한 관계들이 사라지면 돈도 사라진다"고 덧붙였다.
↑한밭레츠 회원인 오민우 두레약국 대표약사가
고객에게 물파스를 팔고 있다. 물파스 등
의료보험 비적용품목을 제외한 다른 약품은
1회당 1500두루까지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다.


"사람이 혼자 살아가려고 드니까 돈이 많이 필요해지는 겁니다. 관계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필요한 것을 구하려고 하면, 벌어야 하는 돈이 줄어들지요."


한밭레츠 사람들한테 레츠는 '선물'이다. 선물은 마음의 표현이다. 선물엔 이자가 붙지 않는다. 선물은 교환 그 자체가 목적이다. 레츠도 그러하다. 돈은 돈을 낳는다지만, 레츠는 많이 모아놔도 저절로 불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레츠 부자든, 돈 부자든 얻는 기쁨은 비슷하다. 예금 자산만 10억원 이상 보유한 김병화(72, 가명)씨는 설 연휴를 앞두고 은행에서 300만원을 인출했다. 은행 직원이 이유를 묻자 그는 "손자, 손녀랑 형편이 어려운 친척들한테 나눠주려고"라고 답했다.

한상언 신한은행 올림픽선수촌지점 PB팀장은 "행복한 노후를 보내는 부자들은 남을 도와주는 데에서, 자신이 가치가 있다는 데에서 만족감을 느낀다"고 귀띔한다.

부자는 빨리 은퇴하고 빈둥거릴까? 아니다. 부자들은 노인이 되어서도 기업 고문을 맡거나 임대사업 등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사회관계를 즐긴다. 문화센터에서 한문을 지도하는 부자노인도 있다.

한 팀장은 "생존에 필요한 일정 정도 자산을 확보했다면, 행복한 노후는 자산의 크기보다 일, 가족, 친구 등 관계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맥가이버와 김씨의 공통점은 일과 관계 속에서 70대에도 건강과 기쁨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다른 점이라면, 맥가이버는 레츠를 벌고 김씨는 돈을 쓴다는 점이랄까?

그러나 아쉽게도 국내에서 현재 레츠가 활성화된 지역은 대전 한밭레츠(www.tjlets.or.kr), 과천품앗이(cafe.daum.net/poomasi), 송파품앗이(www.pumasi.or.kr/pumasi.php) 정도다. 레츠가 통용될 만큼 신뢰가 쌓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게, 혹은 그런 공동체가 존재하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증거다.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우리 인생,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는 돈, 금융자산, 심지어 레츠라 해도 다 해결해줄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한밭레츠 사무실 입구에 놓인 거래일지.
자신의 별칭과 받길 원하는 두루를
적어 사무실에 물품을 가져다두면,
다른 회원이 물품을가져가면서 일지에
자율적으로 기록한다.
가령, 세계 경제가 지구 온난화, 자원 고갈의 한계에 부닥쳐 무너져버리면 연금펀드 등 금융자산은 휴짓조각이 된다. 극심한 불황 속에 신뢰 기반이 무너진 사회에선 레츠 확산에 한계가 있다.

홍 위원은 "한 사회, 경제가 작동하는 원리를 알아야 어떤 위기가 왔을 때 스스로 적절히 대처할 수 있다"며 "미래를 위한 가장 좋은 계획은 지적, 사회적 역량을 높이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김 실장은 "나, 내 다음세대,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가장 좋은 계획은 이웃과 나누고 보살피며 살아가는 것"이라며 "그것으로 단절된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70대에 동네 '맥가이버'가 된 전직 서점주인이 그랬듯.

◇한상언 신한은행 올림픽선수촌지점 PB팀장의 노후자금 계산법
1. 본인이 원하는 자신의 노후 이미지를 그린다. '내 노후엔 어떤 일을 하면서 어느 정도의 생활수준을 누릴까?'
2. 이 때 지출 예상되는 연간 생활비를 추정해 노후기간을 곱한다.
3. 지금까지 확보된 노후자금과 앞으로 들어올 노후자금(연금, 보험, 임대소득, 임금소득 등)을 합한다.
4. 3에서 2를 빼면 부족한 노후자금이 나온다. 필요한 금액이 크다면 고위험고수익 투자 비중을 높이고 필요 금액이 적다면 안전자산 위주로 운영한다.

◇레츠란?
교환, 거래 기능 위주의 대안화폐인 레츠(LETs)는 우리말로 굳이 바꾸자면 '지역교환거래체제(Local Exchange Trading System)'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품앗이' 전통을 요즘 사회에 맞게 현대화했다고 봐도 좋다. 2000년 시작된 '한밭레츠'의 경우, 지난해 580명의 회원이 7373만여 두루, 6899만여원 등 총 1억4273억원의 가치를 교환했다.

이 기사의 관련기사

베스트 클릭

  1. 1 "외벌이 띠동갑 남편, 딴여자 생겨"…6년간 '월말 부부', 아내의 고민
  2. 2 "파병 북한군 포르노 중독"…전쟁터서 만난 신문물에 푹 빠졌다
  3. 3 옥주현 목 관통한 '장침'…무슨일 있나
  4. 4 승무원 자리 털썩 앉더니…238명 탄 대한항공 기내서 외국인 난동
  5. 5 '흑백요리사' 출연 땅 치고 후회할판…"빚투, 전과, 사생활 논란" 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