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B가 금리인하 못하는 이유

머니투데이 김경환 기자 | 2008.01.24 10:21

15개국 단일화폐 유로화 유지 위해 물가 안정이 최고 목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경기에 대한 우려로 시장의 압박에 굴복해 결국 공격적인 금리 인하에 나섰다.

그러나 유럽중앙은행(ECB)은 시장의 압력 행사에도 불구하고 요지 부동이다. ECB는 오히려 한술 더 떠 "물가 안정성이 더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하면서 인플레이션 통제에 중점을 두는 한편 금리 인하는 불가하다는 방침을 밝히고 있다.

과연 무엇 때문에 미국과 유럽간에 이러한 차이점이 만들어졌을까.

물론 ECB라고 해서 경제 상황을 절대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ECB가 경기보다 물가를 더 중요시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존재하고 있다. 미국은 단일 국가로 인플레이션에 대해 유럽에 비해 자유롭기 때문에 경기 문제 해결을 더 우선시할 수 있다. 이는 연준이 위기 때마다 적극적으로 금리를 인하하는 이유다.

◇ 15개국 단일화폐 유로 "인플레 잡기는 숙명"

장 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 총재
하지만 유로존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각자 다른 화폐 체계를 갖고 있던 15개국이 통합해 단일 통화인 유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로존은 단일 화폐인 유로화를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물가 안정이다. 각국마다 인플레이션이 차이가 난다면 결국 단일 통화인 유로화의 존립은 위태롭게 된다. 예를 들어 스페인의 물가 상승률이 10%이고 프랑스의 물가 상승률이 3%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른 화폐를 사용한다면 환율로 간단히 조정될 수 있는 문제다. 그러나 단일 화폐를 사용하기 때문에 대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유럽통화통맹(EMU) 소속 국가들은 인플레이션 목표인 3%를 유지해야만 하는 숙명(?)을 갖고 있다. 금리를 낮춘다면 인플레는 겉잡을 수 없이 높아질 것이고 나라마다 큰 편차로 발생할 것이다. 이는 혼란 수준을 넘어 유럽 경제의 재앙이 된다. 이 경우 유로화는 존폐 위기에 놓이게 될 수 있다.

조금 경기가 위축된다고 하더라도 물가를 잡을 수 있다면 유로존의 경제 안정성은 보장받을 수 있다. 우선 물가가 안정돼야 투자와 소비도 안정되고 이를 통해 경제가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이 이뤄진다. 그리고 미국 경제와 비교해 유럽 경제 전망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 점도 ECB가 금리를 유지할 수 있는 기틀이 되고 있다.


◇ 단일국가 미국과 연합국가체계 EMU의 차이

유럽과 미국은 판이하게 다른 상황이 전개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이러한 차이점을 반영하듯 연준은 지난 22일 미국 경기 침체 우려로 전세계 증시가 폭락하자 긴급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개최하고 전격적으로 기준금리와 재할인율을 각각 0.75%p씩 인하했다. 그리고 오는 30일 열리는 정기 FOMC 회의에서도 추가로 기준금리를 0.5%p 인하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ECB의 관계자들은 여전히 "물가 안정이 ECB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라며 기준 금리를 인하할 의사가 없음을 강조했다. 장 클로드 트리셰 총재 역시 23일 유로 의회에 출석한 자리에서 "인플레이션 기대를 철저하게 통제하는 것이 중앙은행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밝혔다.

특히 그는 "금융시장의 추가적 시장 변동성 확대를 막기 위해서라도 인플레이션은 철저히 관리돼야 한다"면서 "중앙은행은 인플레를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금리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리를 인하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유럽 경제 관료들도 당연히 ECB 입장을 두둔하고 있다. 토마스 미로브 독일 재무 차관은 이날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미국에서 시작한 만큼 이에 대처하는 것도 미국의 과제"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시장은 입장이 다르다. 상당수 애널리스트들은 ECB의 금리 동결에 대해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금리를 내려 경기 침체 우려에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가득하다. 증시 부양에는 금리 인하보다 더 좋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보면 시장의 질타는 근시안 적인 것일 수도 있다. 금리 인하에 나설 경우 인플레는 겉잡을 수 밖에 없다.

ECB는 유럽 경제가 좌초되는 최악의 경우가 아니라면 결단코 금리를 인하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바로 이 것이 ECB가 처한 딜레마이자 숙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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