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을 이틀 앞둔 23일 오후 태안군 소원면 만리포. 밀물이 밀려오자 기름 냄새는 점점 심해졌다. 오전에 닦아냈던 백사장에 다시 검은띠가 물들기 시작했다.
◆눈에 띄게 나아졌지만 여전히 기름 냄새 가시지 않아 = 기름 유출 사고 보름째, 만리포 앞바다를 뒤덮었던 두터운 기름띠는 눈에 띄게 엷어져 있었다. 먼 바다는 서서히 예전 빛깔을 되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사장에는 여전히 까만 기름덩이가 띠를 이뤘다. 깨끗해 보이는 모래밭도 한뼘만 파면 기름 알갱이가 흘러나왔다. 방파제와 해안가 바위는 페인트라도 칠한 듯 기름때에 그을려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은 해안을 따라 길게 늘어서 기름을 제거했다. 처음 태안을 찾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우왕좌왕하던 사람들도 며칠째 자원봉사중인 '베테랑' 봉사자들에게 배우며 곧 작업의 속도를 높였다. 기름띠가 생긴 곳에서 몇분 지나지 않아 새까매진 흡착포가 쏟아져 나왔다. 폐흡착포와 포대를 나르는 손이 바빴다.
◆기름 방제 '묘안' 속출 = 오후 4시 밀물이 들어오자 오전에 제각기 작업을 하던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 이쪽으로 모여주세요." 재난대책본부의 확성기 소리가 사람들을 모았다. 볏짚을 잔뜩 실은 트럭이 세 대. 해안가를 따라 볏짚이 펼쳐졌다. 오전 내내 전날 뿌려 놓았던 볏짚을 수거한 참이었다.
흡수력이 뛰어나다.
만리포에선 22일부터 흡착포 대신 볏짚으로 해안 방제선을 깔기 시작했다. 8일째 만리포에서 자원봉사 중이라는 김 모씨(서울 구로구)는 "볏짚 덕에 작업이 한결 수월해졌다"면서 "수거된 볏짚은 말려서 연료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숟가락과 쓰레받이, 10cm자는 백사장 위에 얇게 깔린 기름띠를 걷어낼 때 위력을 발휘했다.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모래 위에 얇게 뜬 기름막을 떠내다보면 수거통은 기름반 모래반이 되기 십상. 태안군청의 가재일씨는 "모래를 퍼내면 안 된다고 방송하고 있지만 기름과 함께 어느 정도 모래가 수거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면서도 "모래를 줄이고 기름만 퍼내기 위해 쓰레받이나 숟가락 등을 가져오면 작업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나 하나쯤 아니라 나 하나라도 더" = 이튿날 다시 현장을 찾았다. 전날 깔아둔 볏짚을 수거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군데군데 뭉쳐있는 볏짚을 모으니 기름을 잔뜩 먹어 묵직했다. 꼭 세번을 나르고 나니 새 고무장갑이 금세 까매졌다. 잘게 흩어진 지푸라기와 군데군데 깔린 기름덩이를 제거하는 작업이 계속됐다.
"나 혼자 힘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했으면 못 왔죠. 어떻게든 해야겠다,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왔어요. 처음엔 막막했는데 이젠 좀 낫네요." 전날에도 함께 작업했던 김 씨는 인터뷰를 하면서도 기름 먹은 볏짚을 줍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사고 20일째, 태안에 다녀간 자원봉사자는 30만명에 이른다. 검게 오염됐던 태안은 느리지만 확실히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자원봉사자들의 행렬은 지금 이 시간에도 절망의 바다에서 희망의 땀방울을 일궈내고 있다. 태안의 기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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