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와의 전쟁에서 이긴 인도 여장부

틸로니아(인도)=희망대장정,정리=이경숙 기자 | 2007.12.10 15:10

[젊은 아시아, 빈곤을 넘어]<10-1>인도산업연합상 받은 천민출신 여성 노르티데비

편집자주 | 2달러, 우리돈으로 약 1800원. 이 돈으로 아시아 인구 중 9억명이 하루를 삽니다. 21세기 이후 아시아 경제성장률은 연 평균6.3%로 다른 지역의 2배에 가깝습니다. 아시아는 과연 빈곤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그 답을 찾아 김이경, 윤여정, 주세운 등 세 젊은이로 구성된 '희망대장정'팀이 지난 9월, 아시아 최빈국의 빈곤현장에 뛰어들었습니다. 80일 동안 이어질 이들의 희망대장정을 머니투데이가 전해드립니다.

↑노르티 데비 맨발대학 정보센터 교사.
"그땐(80년대초) 하루종일 돌을 캐도 하루에 1루피(약 24원)밖엔 못 벌었어요.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리처럼 사는 줄 알았어요."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한 불가촉천민 출신 여성이 인도산업연합(CII)과 '바르티(BHARTI)재단'으로부터 올해의 '우수여성(Women Exemplar)'상을 받았다.

인도 맨발대학(Barefoot College) 정보센터의 컴퓨터 교사, 노르티 데비(55)씨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인도 라자스탄 지역에서 다른 여성들에게 정보기술을 가르치고 안전한 식수를 보급한 공로를 인정 받았다.

노르티 데비씨는 상금 전액을 미련 없이 맨발대학에 기부했다. '우수여성'상의 상금은 10만루피, 미화로 2564달러. 지난해 인도 1인당 국민소득(797달러)의 3.2배에 달하는 큰 돈이다.

"맨발대학은 여성위원회 활동을 지원하면서 우리 여성이 스스로 변할 수 있는 기회를 줬어요. 여자들한테도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줬죠. 저도 그러한 변화를 일으키고 싶습니다."

지금 그는 1995년 유엔(UN) 여성회의에 참석해 강연하고, 부패한 동네 이장을 벌벌 떨게 만드는 '여장부'다. 그러나 27년 전 맨발대학을 만나기 전에 그는 자신의 권리조차 모르던 인도 최하류층 아낙네였을 뿐이었다.

데비씨는 가난한 불가촉천민의 딸로 태어나 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부터 집안 일을 했다. 당시 여자들은 외출이 제한됐고 나가더라도 싸리(인도의 전통복장)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 외간 남자와 이야기하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는 13살에 라자스탄의 시골 마을 '부바니'에 사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시댁 역시 집안 형편은 좋지 않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산에서 돌을 캐고 운반해도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1루피뿐이었다.

1980년 어느 날, 맨발대학 사람들이 찾아와 '산모와 태아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기초교육'을 제안했다. 아이를 낳다가 병에 걸리거나 목숨을 잃는 여자들이 많았던 탓이었다. 이를 계기로 인도 시골에 여자들만의 모임, '여성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사실 전 교육이 끝난 뒤 노래와 춤을 배우는 시간을 제일 좋아했어요. 노래하고 춤 추면서 나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게 됐죠."

맨발대학이 물고기 양식장을 만들 인부가 필요하다고 했을 때, 그는 "산에서 돌을 캐는 일을 한 적이 있으니 내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당당히 손을 들고 나섰다.

여기서 일하면서 그는 처음으로 '뭔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 맨발대학 양식장 공사장은 하루 8시간 일하면 7루피를 일당으로 줬다. 그러나 정부 공공사업을 할 때엔 하루에 3~4루피 밖에 받지 못했다.

데비씨는 여성위원회에 참석했을 때 이 이야기를 꺼냈다. 여자들은 동의하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마침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맨발대학 창립자 벙커 로이씨가 "여러분의 투쟁을 돕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모두들 맨발대학이 왜 우리를 돕는 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의심하는 여자들도 있었죠. 하지만 벙커 로이씨는 델리에 가서 변호사, 회계사를 데리고 와 소송을 하도록 도와줬어요. 우리는 싸울 용기를 얻게 됐지요."
↑인도 틸로니아 지역의 소녀들.

이들은 함께 정부 공공사업의 임금이 민간사업보다 더 적은 이유를 조사했다. 알고보니 마을이장인 사르판츠씨가 '벌금' 명목으로, 이들의 임금을 하루에 3~4루피씩을 착취하고 있었다.

이에 1981년 라자스탄주 법원은 '노동자의 하루 최소 임금은 7루피'라며 사르판츠씨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마을 여자들은 공공사업을 할 때도 하루 최저 임금 7루피를 보장 받게 되었다. 사르판츠는 마을 이장에서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사르판츠의 횡포는 끊이지 않았다. 1982년 겨울, 마을에 극심한 빈곤이 찾아왔다. 마을 주민들의 생계를 이어주던 정부 공공사업이 더이상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을 여자들은 사르판츠를 찾아갔다. 그는 만나주지 않았다. 마을 여자 60여명은 지역 정부기관을 찾아가 3일 동안 단식 투쟁을 벌였다. 추운 겨울 밤의 단식이 힘들지 않았을까? 데비씨가 장난기 어린 말투로 답했다.

"당연히 힘들었죠. 하지만 우리는 밤에 관료들 몰래 로티(인도식의 얇고 넓은 빵)를 만들어 먹기도 했답니다."

마침내 지역 정부의 관계자가 마을로 조사를 나왔다. 마을 여자들 때문에 이장을 그만 두게 된 사르판츠는 공공사업을 일부러 진행하지 않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결국 경고 조치를 받았다.

부패한 지방공무원인 사르판츠와 마을 여자들의 '전쟁'은 그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열심히 일해 돈을 벌어오면 남편들이 그 돈으로 술을 마시거나 펑펑 써버리자 마을 여자들은 하루 임금 7루피 대신 곡식 4.3kg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사르판츠는 곡식을 굳이 밤에 지급했다. 몰래 300g씩을 착복하고 4kg만 나눠준 것이다. 데비씨는 사르판츠에게 가서 말했다. "임금으로 나눠주는 곡식은 언제나 내가 보는 앞에서 무게를 재도록 하세요"라고.

데비씨는 "계속 사르판츠가 잘못하고 있는 것을 지적해서 그런지 사르판츠가 나만 보면 무서워한다"며 특유의 장난기 어린 미소를 던졌다.

데비씨는 자신의 이런 성격이 아버지 덕분에 만들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딸들이 열린 마음을 가지고 강하게 자라길 바랐다.

"아버지가 좀 유별 나셨어요. 언니나 동생이 부당하게 괴롭히면 싸워야 한다고 부추길 정도였죠. 부당한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싸워야 하는 것이라고요."

그는 "아버지, 남편, 아이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부당한 것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남편, 가족들과 함께 여성위원회에서 나온 이야기를 공유했다. 살림살이는 조금씩 개선됐다. 다른 마을 여자들과 그 가족의 삶도 나아졌다.

그러나 보수적인 남자들은 여성위원회의 활동을 싫어했다. 한 멤버의 남편은 술이 취해 여성위원회 모임에 뛰어들어와 "여자들끼리 모여서 왜 이렇게 모이고 있냐, 당장 그만 두라"고 소리 지르기도 했다.

맨발대학이 지원하는 여성위원회 멤버는 최근 3000여명으로 늘었다. 마을단위로 활동하는 그룹만 65개에 이른다. 이들은 정당한 임금, 안전한 식수, 교육, 가족계획, 건강, 선거권에 대해 토론하고 개선책을 만들어 나간다.

자신의 권리를 찾고자 싸우던 운동가였던 데비씨는 요즘 맨발대학 정보센터에서 컴퓨터를 가르치는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비록 영어에 능숙하지 못해 자신만의 암호로 컴퓨터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그는 "컴퓨터를 통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어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여러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새로운 세대를 열고 있는 그를 보면서 우리는 진정한 인도 여장부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희망대장정팀은?
△김이경(22, 한양대 경제금융 04학번, ODA와치 단원, 한국공정무역연합 자원활동가)
△윤여정(22, 아주대 경영 04학번, 지구촌대학생연합회 전 회장,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 기획단)
△주세운(22, 서울대 지구환경공학 04학번, 서울대 CSR연구회, 한국공정무역연합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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