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촌 "너른 터 주고 꽉 막힌 아파트서 살라고?"

머니투데이 이재경 기자 | 2007.10.24 16:32

[머니위크][르포]은평뉴타운 마지막 수용지

'쨍'하고 울릴 것 같은 청명한 가을 하늘, 그 아래에서 선명한 주황빛의 감이 복스럽게 탱글탱글 익어가고 있다. 담장에는 어지럽게 자라난 넝쿨들이 단풍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집 마당에는 집주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나무들이 운치를 더하고 있다.
눈을 돌리면 집집마다 감나무가 없는 집이 없다. 곳곳의 텃밭에는 상추나 파, 고추가 자라고 있다. 집들은 모두 푸르름에 휩싸여 있다. 길도 넓어 주차된 차 옆으로 다른 차 두 대가 엇갈려 지나갈 만 하다.

주차문제로 이웃 사이에 언성이 높아질 일은 없어 보인다. 한적한 골목, 푸르른 하늘과 풍성한 나무, 익어가는 감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멈춘 듯 하다. 서울시내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동네가 예뻐서 수많은 영화도 이곳에서 촬영했다.

은평뉴타운 동쪽 끝자락의 기자촌. 지난 30여년간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그렇게 조용한 전원생활을 보냈다. 아직도 그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기자촌 건너 은평뉴타운 건설현장의 타워크레인들이 낯설기만 하다. 자연과 인간의 대결이다.

▲기자촌에서 바라본 은평뉴타운 2지구 및 3지구 공사현장. 기자촌의 목가적 풍경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기자촌의 다른 이름은 '은평뉴타운 3-2지구 유보지'. 이 이름을 갖게 된 지난 2004년 이후 기자촌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새 이름은 정든 집을 허물고 아파트를 지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서울시와 SH공사는 지난 8월 이 곳에 대해 보상공고를 냈다. 보상협의를 통해 보상금 및 입주권을 받아 이곳을 떠나라는 통보였다. 그리고 이달 16일 주민들에게 보상협의 통지문을 일괄 발송했다. 보상협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자는 얘기다. 보상협의에 응하면 기자촌에서 멀찍이 떨어진 1지구나 2지구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다고 한다.

사실 이곳 주민들은 아파트가 낯설다. 아파트엔 감나무가 없다. 마당도 없다. 텃밭은 일굴 수 있을 지 미지수다. 수십년간 자녀를 키우며 지켜왔던 집을 떠나기가 쉽지 않다.

주민들은 서울시나 SH공사를 상대로 한참을 싸워왔다. 보상가격을 높여달라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그러나 속내는 다르다. 개발하지 말아달라는, 있는 그대로 보존해달라는 간절한 외침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처럼 살아가는 주거지를 콘크리트로 덮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공원도 지금보다 좋을 리 없다.

하지만 서울시에서 기왕 결정한 것이니 거스를 수는 없는 일. 그래서 보상이라도 좀더 받아야 하지 않겠냐는 일종의 자포자기다.

기자가 만난 한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 "수십년간 자녀를 키웠고 또 분가시켰어. 이제 명절이면 식솔들을 데리고 분가한 자녀들이 다시 찾아오지. 그래서 명절이 되면 기자촌에 차들이 넘쳐나지만 주차문제는 전혀 없어. 공간이 넓거든. 30평짜리 아파트로 이사가면 아들 딸이 찾아와도 앉을 데나 있을 지 모르겠네."

실제 기자촌의 집들은 넓다. 대지면적이 보통 50~70평이다. 물론 이보다 좁은 집들도 많다. 아무리 보상을 잘 받는다고 해도 이런 넓이의 아파트를 얻어갈 수는 없다.

다른 주민은 아쉬움을 털어놨다. "왜 아파트를 짓는 지 모르겠어. 차라리 전원주택지로 개발하지. 여기 환경이 좀 좋아? 그리고 여기는 주로 어르신들이 사는데 아파트에서 적응할 수 있을 지 몰라."

사실 기자촌 주민들은 보상을 받고 입주권을 받는다고 해도 기자촌으로 다시 들어올 수 없다. 서울시는 원주민 특별분양분을 1지구와 2지구로만 국한해 놨다. 3지구인 이 땅에 새로 들어서는 아파트는 외지인들에게만 입주가 허용된다.


기자촌은 은평뉴타운의 마지막 수용지다. 1지구, 2지구와 3-1, 3-2지구는 모두 수용이 끝나 택지개발이 한창이다. 1지구와 2지구 일부는 건설 중인 아파트가 상당히 올라와 있다.

또 기자촌 바로 아래에 붙어있는 '상이군인촌'은 이미 사라져 학교를 짓고 있다.

현재 서울시는 11월까지 보상협의에 응하라는 최후통첩을 발송한 상태다. 다음 달까지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아파트입주권은 사라진다. 주민들에게는 선택권마저 없다.

기자촌은 지난 1969년 진관외동 산 64-1 국유임야에 5만3000여평 택지를 조성해 414동의 주택을 건설한 곳이다. 기자협회가 기자들의 내집마련을 위해 추진했던 사업이다. 당시에는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진관외리라는 주소를 갖고 있었다.

주택지 불하비용으로 가구당 20만원씩을 냈다. 주택 건설비는 당시 주택은행에서 개인당 15년 상환을 조건으로 70만원씩을 대출받았다.

건물은 4개 건설회사에서 구역을 나눠 공사했다. 화성산업 50동, 오양개발 115동, 한국건설 50동, 오양의 연립 15동 등이다. 불행히도 공사도중에 4개 회사가 모두 부도를 냈다. 공사기간이 늘어나고 비용도 증가했다. 건설용 중장비를 기자협회에서 직접 지원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그러나 다행히 군장비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군인촌도 함께 조성하게 됐다. 또 상이군인촌 31가구, 일반인촌 42가구, 광복촌 72가구도 함께 들어섰다.

지금은 기자촌에 기자는 없다. 당시 기자들은 모두 떠났고 지난 30여년 동안 외지인들이 들어와 정착해 있다. 하지만 기자들과의 소송은 여전이 남아 있는 상태다.

1969년부터 시작된 기자촌 개발 당시에는 기부채납 제도가 없었다. 그래서 기자촌의 도로는 모두 사유지다. 아스팔트가 깔리고 수많은 사람과 버스, 승용차가 왕래하는 모든 도로가 사유지다. 명의는 당시 기자협회 멤버들이 구성한 기자협회운영회 앞으로 돼 있다. 그런 도로와 채비지 등을 합쳐 넓이만 1만3000여평에 이른다. 그렇게 30여년이 흘렀다.

은평뉴타운 개발이 시작되고 보상문제가 대두됐다. 기자협회운영회에서 도로에 대해 보상을 받겠다고 나선 것이다.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무효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서는 주민들이 졌지만, 2심에서는 승리했다. 지금은 대법원에서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대법원에서도 승소하면 이 땅들은 보상을 통해 서울시의 소유로 돌아가게 된다.

30년이 넘게 자연에 묻혀 조용히 지내던 이 마을은 사라질 위기 앞에서 각종 행정 및 법적 싸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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