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 늘어나는 지분따라 커지는 책임

머니투데이 김명룡 기자 | 2007.10.18 09:48

[동아제약 경영권분쟁, 기관 액티비즘 시험대 (2)]

# 2002년 3월 휴렛팩커드(HP)의 CEO였던 칼리 피오리나는 컴팩과 합병을 추진했다. 회사의 생사를 가를수 있는 선택이었다. 창업주의 아들인 월터 휴렛 등 대주주들은 이에 반대했다. 양측은 주총을 앞두고 치열한 의결권 전쟁을 벌였다. 주총에서는 합병안이 3%가량 더 많은 표를 얻었다. 컴팩과의 합병은 대주주측의 반대에도 불구, 기관투자자들의 판단에 의해 가결된 것이다. 기관들이 피오리나의 손을 들어줬고, 현재까지 이같은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바클레이스 글로벌 인베스터스(3.1%)와 푸트남(2.51%), 얼라이언스 캐피털(2.34%), 도이체방크(1.6%) 등은 합병에 찬성했고, 브랜즈 인베스트먼트 파트너스(1.3%)와 캘리포니아 연금재단(캘퍼스, 0.4%), 웰스 파고은행 등은 반대했다. 지분이 0.4%에 불과했던 캘퍼스는 대변인을 통해 HP와 컴팩 합병이 장기적으로 캘퍼스 포트폴리오에 이익을 주지 못할 것으로 판단해 반대표를 던진다”고 공식발표까지 했다.

기관투자자로서 돈을 맡긴 고객들로부터 위임받은 권리를 정확하게 행사한 것이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미국의 기관은 단순한 투자자가 아니라 '기업의 파트너' 이자 '경영 감시자'다. '미국 기업의 중요한 경영판단은 월가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는 31일 동아제약 주총을 앞두고 국내 기관투자자들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재영 기업지배구조개선지원센터 기획조사팀장은 “기관투자자들이 의결권 행사를 통해 기업경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라며 “신탁자산을 잘 운용해야 하는 선관의 의무(fiduciary duty)를 다한다는 차원에서 당연한 흐름”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투자금이 늘면서 몸집이 커진 기관투자자들의 기업보유 지분이 점점 커지고 있다”며 “주식을 매도할 경우 주가 폭락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기업의 경영에 문제가 있다고해서 과거처럼 단순매도로 대응할수 없는 경우도 많아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기업의 주식을 5%이상 대량 보유한 기관투자자는 급증하고 있다. 코스피시장에서 기관투자자 5%이상 보유 건수를 보면, 지난 2004년 153건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말에는 256건으로 늘었다. 코스닥시장에서도 기관투자자 5%이상 보유건수는 2004년 96건에서 2006년말 161건으로 급증했다.


기관투자자들의 주식투자 비중도 폭증하고 있다. 지난 2005년 3월만 해도 10조원 수준에 불과했던 국내주식형펀드 수탁액은 이달 초 50조원을 돌파했다. 국내 최대 기관투자자인 국민연금도 주식투자를 점차 늘릴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 중기 재정 운영계획에 따르면 국내 주식시장에 대한 투자규모도 가파르게 확대된다. 국민연금은 2008년 44조원, 2012년에는 120조원 이상을 국내 주식시장에 투자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관투자자들이 의결권을 소홀히 행사하는 것은 선관의 의무를 져버리는 행위라는 지적이다. 김선웅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장은 “의결권을 포기하는 것은 주주로서의 권리는 포기하는 것”이라며 “이는 투자자들의 이익을 지켜야 하는 기관투자자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를 져버리는 비겁한 행위”라고 말했다.

김 소장은 “경영진이 바뀌는 사안에 대해 중립투표를 하는 것은 어떤 경영진이 오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며 “어떤 경영진을 지지할 것이냐를 정하는 것은 고객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기관투자자의 의무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어떤 경영진을 지지하는 것이 고객 자산 보호에 맞는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외국계 운용사 대표는 “한국의 기관투자자들이 아직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꺼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의결권 행사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국내 기관투자자들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번 동아제약 임시주총을 계기로 기관투자자의 의결권을 행사의 정당성 여부를 투자자들이 평가하는 문화가 정착되길 바란다”며 “기관투자자들도 이미 행사한 의결권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례가 되야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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