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이사는 1993년 당시 한흥증권(현 우리투자증권) 리서치본부 시황담당 애널리스트로 근무하다가 트레이더로 변신한다. 사내에 개설된 선물과 옵션과정을 이수했던 경력 때문에 발탁됐다. 1993년 10월부터 1994년 4월까지 시카고에 파생상품 연수를 갔다왔다.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와 시카고상업거래소(CME) 등이 위치한 시카고에서 파생상품 매매기법과 이론교육을 배웠다.
연수후 4명의 동료와 함께 지수선물과 지수옵션 트레이더로 활약했다. 초창기 지수선물시장은 현물(주식)시장과의 연계가 적고 유동성도 부족해서 매매차익을 겨냥한 투기적 거래가 지배했다. 유 이사도 방향성 트레이딩에 주력했다.
지수옵션시장이 도입되고 나서는 콜옵션과 풋옵션을 동시에 매도하는 스트래들매도(지수가 특정 박스권 이내에서 움직이면 증권사가 옵션 프리미엄을 취하는 포지션)을 선호했다.
유 이사가 지수옵션 트레이더로 활약하던 외환위기 이전까지 증권업계 최강은 보람증권(현 하나IB증권) 동양증권 서울증권 등이었다. 이들 증권사는 성과급제로 유능한 트레이더를 대거 영입, 공격적인 영업에 나섰다. 이들 증권사의 트레이더들은 데이 트레이딩과 초단타매매(스캘핑)로 수십억원의 이익을 벌어 억대의 성과급을 받았다.
또한 이 당시 기관투자가의 참여가 부진해 특정세력이 파생상품시장을 휘두르는 모습이 자주 연출됐다. 당시 파생상품시장의 큰 손은 대신증권 목포지점의 장기철씨와 외국계 헤지펀드로 추정됐던 '홍콩 물고기''빅 브라더스' 등이었다.
외환위기 직전 리스크 관리팀장으로 잠시 트레이더직에서 벗어났던 유 이사는 2000년들어 다시 복귀한다. 복귀후 2년도 채 안돼 911 테러를 경험한다. 당시 증권업계에 유행하던 스트래들매도 포지션을 취하고 있던 유이사도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급락이후 글로벌 증시가 곧바로 반등하면서 대부분의 손실을 만회할 수 있었다.
오히려 호된 시련은 테러이후 국내증시가 꾸준히 상승하면서 경험했다. 지수가 예상했던 박스권을 이탈할 정도로 상승하면서 손실을 입었다. 유 이사는 "시장방향성을 열번 잘 예측하다가 한번 실수하면 큰 손실을 볼 수 있는 것이 파생상품의 속성"이라며 "이후 방향성에 베팅하는 매매는 가급적 자제했다"고 밝혔다.
유 이사는 2004년 6월 장내파생상품 트레이더에서 장외파생 트레이더로 변신한다. 우리투자증권에서 6개종목의 ELS를 발행하여 이중 3개 를 자체 헤지한 것. 유 이사도 이들 3개종목의 기초자산을 직접 트레이딩했다. 매매차익에만 초점을 맞췄던 장내파생과 달리 장외파생은 좀 더 많은 금융공학지식을 요구했다. ELS 트레이더로 변신하기 전에 연세대에서 4개월간 '퀀트(계량분석가)'과정을 이수했다.
유 이사는 2005년 3월 현재의 미래에셋증권으로 자리를 옮긴다. 미래에셋증권이 장외파생상품 시장에 진출하면서 ELW ELS 트레이딩 책임자로 옮겼다.
그는 "10년넘게 트레이더로서 '대박'을 터트린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쪽박'을 찬 경우도 없었다"며 "레버리지가 큰 파생상품 트레이더가 장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리스크 관리가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트레이더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옵션 등 금융지식이 풍부해야 하나 적절한 시점에 리스크를 수용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력이 더욱 더 중요하다"고 10년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트레이더'론을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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