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사업의 귀족들

예종석 한양대 경영학 교수 | 2007.07.03 11:14

[쿨머니칼럼]기부를 전문화한 부자들

요즘 우리 사회의 기부문화가 상당히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직도 기업의 기부에 비해 개인기부가 너무 적은 것은 아쉬운 대목이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기부의 주역인 할머니들께서는 여전히 기부에 앞장서고 계시고 기업들의 기부와 봉사활동도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사회공헌 전담조직을 회사 내에 신설하는 기업들도 많아졌다. 개중에는 숨은 의도를 의심하게 하는 찜찜한 기부도 있고, 자발적이라고 보기는 힘든 '울며 겨자먹기'형 기부는 물론, 내용은 부실한데 생색만 크게 내려는 눈 가리고 아웅형 기부도 있지만 그런 기부라도 많아진 것은 어쨌거나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우리 사회의 기부는 아직도 상당 부분이 장학 사업쪽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장학 사업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그래도 사회가 이정도 성장했으면 기부도 선진사회처럼 도서관이나 박물관, 병원, 대학, 문화예술단체, 자선봉사단체등 좀 다양한 용처에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기부선진국인 미국의 예를 보자. TV가이드로 유명한 출판재벌 월터 아넨버그는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기부를 통해 '자선사업의 귀족'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1988년에 설립한 아넨버그재단을 통해 문화예술단체와 공영라디오 NPR 등에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평생 수집한 고흐, 모네 르노아르, 피카소 등 수많은 작품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부하고 전시 공간 확장에도 기여하는 등 엄청난 규모의 기부와 지원으로 뉴욕의 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폴락-크레스너 재단의 예술가 지원활동은 예술가의 예술가에 대한 지원이라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교통사고로 요절한 천재화가 잭슨 폴락의 부인이자 자신도 뛰어난 화가인 크레스너는 폴락과 자신의 그림을 매각한 자금으로 폴락-크레스너 재단을 설립하여 재능은 있으나 가난한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있다. 젊은 시절, 아이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크레스너는 지원 대상을 화가나 조각가 같은 순수 예술가들로 제한하여 집중적으로 돕는다. 폴락-크레스너 재단의 활동은 문화예술분야에 대한 지원 사업 중에서는 가장 성공적인 모델로 꼽힌다.


빌 게이츠와 함께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창업자였던 폴 앨런은 자신의 고향인 시애틀의 환경, 예술, 문화발전을 위해 기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시애틀 곳곳에 박물관, 음악당, 미술관을 짓고, 자신이 좋아하는 시애틀 출신의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를 추모하는 사업에 지원하는 등 자신의 관심 분야에만 기부한다. 시애틀을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그를 사람들은 ‘시애틀의 메디치’라고 부른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만 기부하는 그는 자선이 얼마나 즐거운 일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그 외에도 세계적인 화장품회사인 에스티 라우더의 경영자 에블린 라우더는 여성들로 부터 번 돈을 여성을 위해 쓰겠다며 유방암 퇴치를 위한 각종 사업을 지원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세계적인 제약회사 존슨앤존슨의 창업주 로버트 우드 존슨이 설립한 재단은 보건의료 분야에 집중기부하고 있으며 석유왕 폴 게티의 재단은 예술사 연구와 문화유산의 보호활동을 주로 지원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기부도 이제는 천편일률적인 장학재단 설립이 아니라 이렇게 세분화된 영역에 집중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기대일까. 이렇게 전문화된 기부는 우리 사회의 다양성 확보와 균형 발전에 크게 기여 할 것이다. 이제 우리의 기부도 불우이웃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을 뜻하는 자선(charity)의 단계를 뛰어넘어 공적인 목적의 기부까지 포함하는 보다 넓은 의미의 박애(philanthropy)를 향해 다가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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