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10년, 장하성 10년'

머니투데이 뉴욕=유승호 특파원 | 2007.02.09 15:21

[뉴욕리포트]여전히 먼 '글로벌 스탠더드'…뉴욕 강연 여운

뉴욕에서 장하성 고려대 교수(경영대학원장)의 강연을 듣다보니 불현듯 10년전 일들이 스쳐갔다.

한국은행 기자실에서 건영,우성 등 하루가 멀다하고 부도 기사를 전송하던 일, 제일은행서 열린 채권단회의로 가던 택시안에서 "오늘 한보 명운이 갈릴 것 같다"고 데스크에 보고했던 일, 과천 종합청사에서 임창렬 당시 부총리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에 대해 설명하던 일들….

장 교수가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소액주주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도 바로 10년전인 1997년이다.

그리고, 금융감독위원회가 설립된 후 4개 은행 퇴출, 100개가 넘는 기업들의 워크아웃, 20세기 최대 파산으로 기록되는 대우그룹 붕괴까지 숨가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뉴욕이란 도시는 'IMF 10년'을 맞는 한국에게 특별한 곳이다. 국가 부도 위기를 맞아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파견한 특사들이 매서운 겨울 날씨에 "만기 연장 좀 해달라"며 채권은행들을 찾아다니던 곳이다.

지난 7일 맨해튼 57번가 8층 코리아 소사이어티 강연장에는 월가의 투자자들도 많이 참석했다. 월가의 은행 관계자, 펀드매니저, 애널리스트, 회계사 등을 비롯해 경제관련 TV채널 관계자 등도 보였다.

강연장을 찾아가며 "아직도 장 교수인가"라는 다소 시큰둥한 생각을 했다. " 'IMF 10년' 동안 퇴출, 구조조정, 제도개혁에 그리도 몸살을 앓았는데, 심지어 금감원은 일본까지 건너가 성공사례 발표까지 다니지 않았던가. 장 교수와 같은 엔지오(NGO)는 시장 기능이 정상적인 작동을 하지 않을 때나 나서는 것 아닌가. 이제 한국도 시장 감시 기능이 웬만큼 자리잡았을텐데.."

잠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이유로 장 교수의 최근 활동에 대해 관심을 갖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문득 장 교수에 대한 10년전 기억이 떠올랐다. 외국인이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지금의 절반 정도나 되던 그 때, 한 영국계 금융사의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장 교수의 소액주주 활동에 관심이 크다. 한국에서도 이제 주주 자본주의가 태동하는 지 지켜보고 있다. 그동안 외국인들은 한국 주식에 투자하고 싶어도 권리 위에 낮잠자는 소액주주들밖에 없는 시장에 투자하기 힘들었다"

문어발식 확장, 황제경영 등 기업들의 불투명한 경영행태보다도 소액주주들의 침묵이 외국인 투자에 더 큰 우려 요소였다는 다소 역설적인 얘기였다.

강연이 시작됐다. "이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삼성이 만들어낸 '집적회로'입니다. 반도체칩이냐구요?"

거미줄처럼 엮인 계열사와 관계사의 직간접적인 출자관계를 선으로 연결한 모습이 마치 집적회로를 연상케 한다.

장 교수는 "삼성의 경우 기업지배구조가 많이 개선됐다"고 소개했다. 1997년 사외이사가 한 명도 없이 59명의 이사들이 있었으나 지난 해 7명의 사외이사, 13명의 사내이사로 이사진이 바뀌어 사외이사의 경영감시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 교수와 삼성은 흔히 '악연'으로 얘기된다. 장 교수 자신도 얼마전 "삼성전자 이후 내 인생 불편해졌다"고 했다. 장 교수는 삼성전자를 상대로 주주대표소송을 벌여 이건희 회장에게 타격을 준 것 때문에 '삼성 저격수', '테러리스트'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장 교수는 '주연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필요한 조연'이 아니었을까. 삼성전자의 외국인 지분율이 82%에 달하는 동안 '불편한 조연'이 기여한 것을 부인할 수 있을까. 삼성전자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것은 장 교수의 지적대로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과 기라성 같은 경영진, 기술진, 즉 '주연'들의 활약 때문이었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아무튼 아직까지도 한국 상장사들이 '글로벌 스탠더드'를 기준으로 경쟁력있는 기업지배구조를 가지려면 '여전히 먼 길'을 가야한다는 게 이날의 강연의 주제였다.


크레딧리요네증권의 아시아 10개국 기업지배구조 평가(2005년)에서 한국은 50점을 얻어 싱가포르(70) 홍콩(69) 인도(61) 말레이지아(56) 타이완(52)에 이어 6위였다.

"싱가포르 홍콩은 그렇다치고 말레이지아,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인도보다 못하단 말인가? 그래도 10대 경제국이라 자부하지 않았나?"

하지만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발표한 기업지배구조 인덱스(2003년)에서도 한국은 31위로 말레이지아(21위), 타이완(23위), 태국(28위)보다 낮았다. IMD 국가 경쟁력 보고서상 기업지배구조 순위(2006년)에서는 홍콩(7위) 싱가포르(10위) 인도(23위) 필리핀(40위) 중국 본토(45위)보다도 낮은 52위, 사실상 거의 꼴찌였다.

"시장주의자가 반 기업적 인사로 매도되는 이상한 상황입니다. 외국인, 주주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좌파와 우파가 '기이하게 연합(Weird alliance)'하고 있어요. 주주 자본주의를 하지 말자는 건가요. 주식을 통한 자금조달(Equity financing)을 하지 않으면 은행 부채를 통한 자금조달(Debt financing)방식으로 돌아가자는 건가요. 은행 부채방식 기업자금 조달이 97년 외환위기의 원인이었지 않습니까"

장 교수는 SK에 투자했던 소버린을 '행동주의 투자'로 규정한다. 소위 '장하성 펀드'로 불리는 라자드의 기업지배구조개선펀드도 행동주의 펀드다.

"소버린이 남긴 학습효과를 되새겨 봐야 합니다. 소버린은 2003년 SK 주식을 매입, 2년3개월 동안 보유했던 비교적 장기투자자였지 이른바 '먹튀'가 아니였습니다. 한국 투자자 가운데 한 종목에 2년이상 투자하는 사람을 단기투자자라고 합니까? 그리고, 소버린 투자로 급등했던 SK 주가는 떠난 뒤에도 계속 상승세를 지켰습니다. 더욱이 소버린이 SK 투자로 벌어들인 돈은 8억달러(7440억원)였고 다른 주주들이 얻은 이익은 45억달러(4조1850억원)였습니다. 같은 기간 주가지수 코스피 상승률이 83%인 반면 SK 주가상승률은 6배가 훨씬 넘는 540%에 달했습니다"

이처럼 기업지배구조개선을 통해 주가가 '제 값'을 받을 수 있는 기업들이 너무나 많다는 게 장 교수의 발표 요지였다.

증권선물거래소 사이트에 들어가 한국 상장사들의 평균 주가수익률(PER)을 뒤져보니 불길하게도 1997년 'IMF 구제금융 체제' 직전과 똑같아졌다. 2005년 코스피 평균 PER은 10.98로 1996년 10.98과 똑같았다. 금융.기업 구조조정이 한창이던 1999~2002년까지 PER은 34.63, 15.34, 29.29, 15.61 등으로 상대적으로 높았다.

CSFB는 한국의 PER이 2006년에 11.7로 약간 높아졌다가 2007년엔 10.1로 낮아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주가수익률은 주가를 1주당 연간 세후 이익금으로 나눈 비율로, 한 기업의 주식이 시장에서 얼마나 대접을 받는 지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높으면 회사의 이익에 비해 주가가 상대적으로 높은 것을 뜻하며, 반대일 때는 주가가 이익에 비하여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주식의 평균PER 10.98은 인도(22.7) 홍콩(16.9) 싱가포르(18.0) 필리핀(16.5) 말레이지아(16.5) 중국(15.9)보다 현저히 낮다.

장 교수의 강연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한국의 기업들이 열심히 일한 대가로 발생시킨 수익금이나 자산규모에 비해 주가가 매우 낮은 것은 주식가치를 깎아먹는 기업 경영구조(지배구조)상 문제, 즉 속병이 또 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감독기관이나 기관투자자 등이 이런 문제를 적극적으로 가려내고 단죄하는 기능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장 교수 같은 시장의 '조연' NGO가 나서서 시끄럽게 설쳐야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일종의 경보인 셈이다.

라자드 기업지배구조개선 펀드의 운용을 맡고 있는 존 리씨는 "IMF전과 비교해 기업 경영상의 도덕적 해이가 더 심각해졌다고 느낄 정도"라며 "그때를 경험 삼아 이제 훨씬 정교하고 철저해진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월가의 아시아시장 투자를 맡고 있는 한 펀드매니저가 최근 "당분간 중국, 인도 등 다른 이머징마켓에 자금을 집중하느라 한국에 투자금을 배정하지 못할 것 같다"고 한 말이 자꾸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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