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에세이]나는 백과사전이 아니다

김영권 정보통신부장 겸 특집기획부장 | 2006.12.07 12:55

학교는 내가 원하는 것을 깨우치는데 관심이 없었다

나는 기억력이 별로다. 더 솔직히 말하면 머리가 좋지 않다. 그러니 웬만한 정보들은 오래 남아 있지 않고 금세 지워진다. 학교에서 배운 것들도 대부분 머릿 속에서 사라졌다.
 
ㆍ수학〓삼각형의 면적을 내는 공식조차 가물가물하다. 당연히 미분이며 적분이며 하며 골머리를 썩었던 복잡한 공식과 이상한 기호들은 전혀 모르겠다. 학원과 과외와 독서실을 쳇바퀴처럼 돌며 들인 공과 스트레스가 너무 억울하다. 한마디로 본전 생각난다.
 
ㆍ화학〓그렇게 달달 외웠던 원소 기호와 주기율표가 백지가 됐다. 주기율이 뭔지도 모르겠다.
 
ㆍ역사〓국사는 물론 세계사까지 연대기를 줄줄 외우고, 묻기만 하면 답이 척척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희미한 흔적만 남아 있다. 성능이 떨어지는 머리로 무조건 외우기만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이뿐인가. 생물 지리 사회 기술 도덕 음악 미술 독일어 등등 엄청 많은 과목을 배웠지만 뭘 배웠는지 잘 모르겠다. 당연히 뭘 잊어버렸는지 자세히 따져 볼 수도 없다. 교과서에 멋진 시와 수필도 있었던 것 같은데 결국 남아 있는 게 없다. 그렇다고 살아가는데 불편한 건 없다.

아주 드물지만 학교에서 잘 배운 것도 있다.
 
ㆍ한자〓이건 정말 유용하다. 이걸 '가르쳐야 한다', '아니다' 하며 말이 많지만 내 생각에는 꼭 가르쳐야 한다. 우리말 사랑을 위해서도 한자는 알아야 한다. 고사성어에 얽힌 사연과 그것이 함축한 의미는 또한 얼마나 쓸모가 많은가.

ㆍ영어〓이건 토를 달 필요가 없겠다. 모르면 세상을 넓게 살 수 없다. 그래서 20년은 족히 배웠다. 하지만 지금도 들리지 않는다. 들리지 않으니 입도 열리지 않는다.


학교에서 배운 것중 쓸데 없이 메모리를 잡아 먹고 있는 것도 있다.

예컨대 국민교육헌장. 이건 지금도 자동이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 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국기에 대한 경례도 기억속에 건재하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그나마 이런 것들은 시대적 당위가 있었다고 하자. 여기서 한참 더 나간 유신 독재헌법이며 살벌한 반공 이데올로기, 구타와 서열을 부추기는 군대문화들은 다시 뒤집어 생각하느라 그 귀한 청춘의 에너지를 많이도 소진해 버렸다.

하지만 아직도 허공에 붕 뜬 허망한 이론과 주의·주장, 아무 짝에도 쓸데 없는 쓰레기 정보들이 머릿 속을 꽉 채우고 있으니 안 좋은 머리가 더 복잡하고 흐릿할 수 밖에 없다. 나는 '백과사전'이 아니다.

그럼 지금 내 머릿 속에 생생하게 남아 나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좋아서 스스로 한 공부다. 내가 좋아서 읽고 생각하고 느낀 것이다. 내가 원해서 보고 듣고 감동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중 학교 과목에 들어있던 것은 없다. 학교는 내가 원하는 것을 깨우치는데 관심이 없었다.

이게 나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면 평준화니 차별화니 하며 세상이 시끄러운 교육정책 논란도 사치다. 그것은 시험성적만으로 우열반을 만드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특목고'라는 것도 외국어고니 과학고니 간판은 그럴 듯 하지만 사실은 성적 순으로만 차별화했을 뿐이다. 개성과 다양성과 상상력을 담아 내지 못하는 학교는 싸구려 학생을 찍어내는 '잡학공장'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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