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는 왜 공주를 떠났을까

머니투데이 박창욱 기자 | 2006.07.02 08:07

[영화속의 성공학]스물여덟번째 글..'시네마 천국'

# 1.

누구나 추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람마다 추억이 주는 의미는 모두 다르다.
어떤 이들에게 추억은 매우 잔인하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때로는 어제 느꼈던 기쁨조차도 오늘 겪는 가장 비참한 슬픔이 되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추억이란 아름다운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의 삶은 행복하다. 보통 여성들 가운데 이런 유형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시인 T.S 엘리어트는 "남자는 망각으로 살아가고, 여자는 추억으로 살아간다"고 했던가. 그녀들은 때론 한발 더 나아가 추억을 삶의 에너지로 삼기도 한다.

왜 추억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고, 때론 잔인한 기억이 되기도 하는 걸까. 아마도 추억이 그저 추억으로만 머물러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사실 추억은 그 일이 일어날 당시엔 엄연한 현실이다. 그저 아름답거나 로맨틱한 것만은 아니다.

그런 과거의 일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원래 묻어있던 현실의 혹독함들이 차차 벗겨져 나간다. 그 때야 비로소 추억이 되고 낭만이 된다. 아마도 추억이 아름다워지려면 그 추억에 매달려선 안 되는 것 같다. 만약 과거의 추억에 매달린 있는 채로 살아간다면, 그 추억들은 고스란히 지금도 꿈틀거리는 혹독한 현실이 되버리고 만다. 버릴 수 있어야 그 때, 추억은 제대로 추억이 된다.

다음은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알프레도 아저씨가 토토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옛날에 왕이 있었다. 어느날 무도회를 열어 모두에게 궁을 개방했다. 병사는 그 무도회에서 공주를 보았다. 아름다운 공주에게 병사는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병사는 공주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그러나 신분의 차이는 엄연했고, 공주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공주는 병사에게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자신이 사는 성벽 아래에서 100일동안 자신을 기다린다면 사랑을 받아들이겠노라고. 병사는 하염없이 기다렸다. 10일, 20일, 30일… 드디어 99일째가 됐다.

공주는 병사의 정성에 감복했다. 내일이면 문을 열고 나가 드디어 병사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병사는 떠나고 없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서.

알프레도 아저씨는 토토에게 묻는다. `과연 병사는 왜 공주를 떠난 걸까.` 알프레도 아저씨도 답을 모른다. 어차피 정답도 없는 문제다. 왜 병사는 공주는 떠났을까. 다들 한번 생각해보자.

# 2.

예전 대학교에 다닐 무렵이다. 자취방에 영화를 좋아하던 친구 셋이 모였다. 가벼운 술 한잔에 영화에 관한 이야기꽃을 피웠다. 각자 지금껏 본 영화 가운데 최고의 영화 '베스트5'를 꼽아 보기로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 세 사람 모두 1순위로 영화 '시네마 천국'을 선택했다. 의견도 비슷했다. 사랑, 우정, 일, 추억, 가족 등 인생이 모두 녹아 있는 영화라는 평가였다.

영화는 힘들고 혹독한 현실에서 도망가지도, 그 현실을 괜시리 미화하지도 않으면서 담담하게 추억을 그려내고 있다.

이 영화는 엔리오 모리코네의 감미로운 주제음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아마 많은 분들이 보셨으리라 짐작된다.

혹시 못 보신 분이라면 꼭 한번 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다. 사는 동안 적어도 한번은 꼭 봐야 하는 영화라고 감히 말씀드린다.


참, 이 영화는 세 가지 버전이 있다. 원 개봉판과 '신 시네마천국'으로 알려진 토토의 중년 이후 장면이 늘어난 버전, 그리고 디렉터스 컷(감독편집본)이 있다.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 장면에 젖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원 개봉판이 좋을 것 같고,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은 분들이라면 '신시네마 천국'이 더 나을 것 같다. 감독판은 두번째 버전과 별 차이가 없다. 조금 분량이 더 길 뿐이다.

이 글에선 토토의 인생을 좌우했던 엘레나와의 첫 사랑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자. 먼저 못 보신 분들을 위해 줄거리를 간단히 설명해드릴 생각도 했다. 사실 대부분 좋은 영화들은 대략의 줄거리를 알더라도 즐기는 데 별로 상관이 없다.

하지만 아무래도 보신 분들에겐 사족이 될 것 같다. 대신 토토의 1인칭 독백 형식으로 글을 풀어갈까 한다. 물론 그 독백엔 악의 없는(?) 스포일러에 필자의 생각을 더했다.

# 3.

어린 시절, 알프레도 아저씨는 내가 키스장면이 담긴 토막필름을 달라고 떼를 쓰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토토, 이것은 분명 네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때가 되면 돌려주마." 아저씨는 돌아가시면서 유품으로 내게 그 필름을 남겨주셨다. 난 그걸 돌려보면서 비로소 아저씨의 깊은 뜻을 알게 됐다.

인생에서 때로는 가질 수 없어서, 훨씬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또 지금 당장 손에 쥘 수 없어서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도 분명히 있다는 점을 말이다. 바로 첫사랑 엘레나가 내겐 그랬다. 스무살 시절에 내게 엘레나는 인생의 전부였다. 그녀만 있으면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하지만 세상은 녹록치 않았다. 부자인 엘레나의 부모님은 가난한 영사기사인 나를 반대했다. 그래도 엘레나는 나를 따라 함께 도망갈 줄 알았다. 그녀도 나를 사랑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나오기로 한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세상의 전부였던 엘레나가 나를 버리다니. 나중에야 알프레도 아저씨가 약속장소를 담은 쪽지를 가려 그녀와 내가 만나는 것을 방해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지만 지금 아저씨를 원망하진 않는다. 아저씨는 늘 나를 걱정하셨다. 시골마을에 안주하는 걸 싫어하셨다. 더 큰 세상으로 나가길 바라셨다. "네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어, 훨씬 중요한 일이. 여긴 너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해. 떠나라. 절대 향수에 빠져선 안 돼. 만약 중간에 돌아오면 널 만나지 않겠다."

아저씨는 시골마을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더 이상 혹독한 현실이 아닌,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남을 수 있기를 바라셨다. "넌 여기에 사는 동안 여기가 세계의 중심인 줄 알거야.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나 2년 정도만 떠나 있으면 변한 것을 느끼게 되고 그다지 보고 싶은 사람도 없어지게 되지. 한 번 이곳을 뜨면 아주 오래 있다 와야해. 그러다 귀향을 하면 친구들과 정든 땅을 느낄 수 있어."

하지만 난 어리석게도 오랫동안 고향을 싫어했다. 쓰라린 실연의 상처가 싫었다. 그래서 찾아가지도 않았다. 여자를 믿을 수 없었다. 당연히 사랑을 할 수 없었다. 대신 일에만 매달렸다. 나를 무시한 세상에 복수하고 싶었다. 유명한 영화감독이 됐다.

흔히 말하는 성공을 쟁취했다. 처음엔 순전히 내 노력만으로 얻어낸 성공인 줄 알았다. 그래도 난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하지 못했으니까. 내게 고향의 기억은 아픔만 줄 뿐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난 많은 것을 잊은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나는 언제나 고향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을. 난 알프레도 아저씨의 사랑속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어머니의 배려 속에서, 영화를 사랑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속에서 머물러 있었다. 나의 성공은 바로 이런 것들 덕분이었다.
참, 아저씨는 이런 말씀도 해주셨지. "영사기 돌리는 일을 사랑하듯, 무슨 일을 하든 네 일을 사랑하렴. 네가 작은 악마일때처럼." 난 아저씨의 말대로 엘레나와 고향을 떠나왔기에 대신 영화감독이라는 내 인생을 얻을 수 있었다.

사실 오랫동안 사랑을 하지 못했던 것도 따지고보면 순전히 내 탓이었다. 실연의 상처에만 빠져, 과거에만 연연했다. 그랬기에 엘레나와 열정적이었던 첫사랑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잡지 못했고, 오히려 그 기억은 내게 오랫동안 엄연한 현실로 이어졌다.

헤어졌던 기억이 아니라 순수하게 사랑했던 열정만 남겼으면 되는 것인데. 그랬다면 그 추억은 평생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됐을텐데. 이제서야 알프레도 아저씨가 들려줬던 이야기에서 병사가 공주를 떠난 이유를 알것 같다. 지금부터라도 사랑을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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