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골을 동해 바다에 뿌려라"

박창욱 기자 | 2006.02.21 12:39

편집자주 | 부끄러움을 대가로 한 권력이나 부는 정당하지도 않을뿐더러 오래가지도 못한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는 "정직만큼 부유한 유산도 없다"고 했다. 성실하고 올바른 인생에서 얻어지는 명예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위대한 유산이다. 한국CEO연구포럼과 머니투데이가 지난 7일 공동주최한 `제1회 한국 CEO 그랑프리' 시상식에서 `아름다운 CEO`상을 받은 박종규(70) KSS해운 고문. 그는 은퇴하면서 자식들에게 회사를 물려주지 않았다. 대신 회사와 자식들에게 모두 강한 독립심을 불어 넣었다. 그는 아울러 우리 사회에도 `올바른 기업가 정신`이라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조만간 그 나무엔 주렁주렁 열매가 열리게 돼 있다. 그 열매의 이름은 이렇다. `위대한 한국`.

[제1회 한국 CEO 그랑프리 `아름다운 CEO`상 ―박종규 KSS해운 고문 인터뷰(상)]
 
박종규(70) KSS해운 고문은 지난해 8월 위암으로 수술을 받았다. 지금은 다 나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꽤 수척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매우 밝고 행복해 보였다. 오로지 돈이나 권력만을 쫓았다면 절대 가질 수 없는 그런 표정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그토록 편안하게 보이도록 만들었을까. 사상가 리히텐베르크는 "오래가는 행복은 정직한 것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진정한 행복이란 양적인 개념이 결코 아니다. 그랬다. 박 고문의 그 행복한 표정은 그가 걸어온 후회없는 삶때문이었다. 열정적이면서도 누구에게나 당당했던 기업가의 인생 말이다.
 
# 제대로 된 주식회사
 
모두가 어렵던 60년대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행히도 당시 국영기업이었던 대한해운공사에 공채로 들어갔습니다. 앞으로 20,30년 뒤엔 나도 사장이 되어 사회에 봉사하는 경영자가 돼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하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노사문제에 정통한 사람이 사장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업문제가 극심하던 당시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 선박에 선원을 송출하자고 해운노조에 제안했습니다. 처음엔 믿지 못하던 노조위원장도 100여개 회사에 영문편지를 보내는 제 열의에 감복해 적극 협조해주었지요. 유럽에서도 노사분규가 극심하던 상황이라 비록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노조원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엔 제가 사무직원임에도 불구하고 해운노조 지부의 부지부장까지 할 정도였지요."
 
그는 회사에서나 노조에서나 일벌레로 통했다. "선박을 도입하고 매각하는 일과 해운시장의 전망을 분석하는 업무를 하면서 점점 전문성을 쌓아갔습니다. 또 선박 건조와 관련, 금융조달을 위해 관계당국을 이해시키는 일도 제가 맡은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였지요. 아울러 선원수첩을 여권으로 대신하는 제도를 추진, 이를 탄생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사주조합 운동을 펼쳐나갔다. "박정희 정권 당시, 서슬이 퍼렀던 시절이었습니다. 종업원들이 회사 주식을 가진다고 하면 자칫 `빨갱이`로 오해받을 수도 있었지요. 하지만 종업원들이 돈을 모으고 사회 각계 각층의 사람들에게 주식을 사도록 운동을 벌이면 주식도 분산되고 특정 재벌에게 국영기업이 불하되는 일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사주조합운동은 결국 회사가 특정인에게 넘어가면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미련없이 회사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어느 개인회사에 취직했지요. 그런데 사주가 회사돈을 마치 개인돈처럼 쓰는 걸 목격하게 됐습니다. 한국의 고질적인 기업병이라 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제대로 된 주식회사를 한번 만들어보자고 결심해 창업했습니다. 함께 일하는 모든 사람들과 주주가 대접받는 그런 회사 말입니다."
 
# 뒷돈(리베이트)은 없다
 
창업하면서 화학약품 등 특수화물 운송을 주업으로 삼았다. "일단 일본으로 건너가 배를 들여 와야 했습니다. 자본금이 열악했던 저는해외금융을 리스 방식으로 조달해 선가를 몇 년동안 분할 상환한 후 국적선으로 구입하는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측 선주가 뒷돈을 요구했습니다. 절대 줄 수 없다고 버티면서 결국 선박도입 계약을 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보증보험을 구하지 못해 금융지원을 받을 방법이 끊겨 버렸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일본 상사를 찾아갔지요. 그들은 `검토해보겠습니다`라고 하더군요. 당시 일본어가 짧았던 저는 그 뜻이 완곡한 거절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매일 그 회사를 찾아갔지요."
 
그러는 사이 어느덧 8개월이 흘러 여름이 돼 가고 있었다. "일본 현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하숙집을 전전했습니다. 어느날 포장마차에서 끼니를 떼우는데 보험영업사원이 보험에 들라고 하더군요. 3개월만 보험료를 내면 자살을 하더라도 1억엔의 보험금이 나온다는 말에 눈에 번쩍 띄였지요. `내 목숨 하나 버려서 회사를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해야지`라는 각오를 했더니 용기가 나더라구요."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매일 찾아가던 일본 상사에서 제 정성에 감복해 민간기업 보증이라도 받아오면 금융지원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결국 받았습니다. 그래서 전 회사 주식을 담보로 당시 대기업의 보증을 받아 결국 배를 들여올 수 있었지요."
 

온갖 고난과 우여곡절끝에 사업을 드디어 시작했다. "안정적으로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장기계약을 따야 했습니다. 그런데 고객사가 일본해운사보다도 운임을 싸게 해주겠다는 데도 계약을 안 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보니 일본 해운사에서 리베이트를 받고 있었습니다. 전 리베이트는 절대 줄 수 없다면서 대신 그만큼 운임을 깍아주겠다고 했지요. 계약에 성공하고 나서 회사로 돌아가 전 직원들에게 선언했습니다. 앞으로 `리베이트는 절대 없다`고 말입니다."
 
# 세습 불가
 
박 고문은 자신의 기업경영 철학을 한 마디로 이렇게 정리했다.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원칙은 지킨다.' KSS해운을 들여다 보면 없는 것이 많다. 앞서 이야기한 리베이트를 비롯해 사시(社是), 분식회계, 인맥, 그리고 경영권 세습 등이다. "그냥 실천하면 되는 거지 거창한 구호가 뭣 때문에 필요합니까? 기업은 실용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회사엔 부사장 이하 임원들은 별도 집무실없이 직원들과 함께 일합니다."
 
KSS해운의 회계는 직원들이 알아서 한다. 결산의 최종 결재권자는 총무부장이다. "일선 직원들에게 단가 협상에 관한 권한을 대폭 위임했습니다. 그리고 리베이트도 없으니 장부조작을 할 일이 없는 거죠."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제가 출장을 간 사이에 집에 세무서 직원들이 들이닥쳤습니다. 불시 세무조사를 위해서이지요. 그런데 미국에서 유학하던 제 아들이 보낸 편지 한통을 보고선 모두 돌아갔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아무리 아껴쓰고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도 생활비가 한달에 100달러 정도 부족합니다. 죄송하지만 아버지께서 제발 그것만이라도 보내주시면 안될까요.`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라고 왜 자식이 귀엽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독립심을 심어주기 위해선 독한 마음을 먹어야 했지요."
 
재산은 상속할 수 있어도 아무런 경쟁을 거치지 않은 자식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일은 안된다는 것이 그의 평소 소신이었다. 그래서 사업초창기부터 당연히 회사를 이끌어갈 인재를 열심히 찾아야 했다.
 
"현 회장인 장두찬씨는 제가 창업할 당시 해군장교로 복무하다가, 해운업체 동향을 조사하기 위해 회사를 방문했습니다. 전 그의 성실한 태도에 호감을 가져 `호형호제`하는 관계가 됐지요. 복무기간이 몇 년이나 남아 있었지만 전 그에게 계속 같이 일하자고 제의를 했고, 그는 전역 후 우리 회사를 이끄는 핵심인재가 됐습니다."
 
박 고문은 우리 사회에 올바른 기업문화를 만들기 위해 93년부터 바른경제동인회를 만들어 지금까지도 활동하고 있다. "기업인 스스로의 개혁을 통해 존경받는 기업인로서 자부심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가장 큰 보람은 기업들이 신용카드로 거래하면 세금을 공제해주는 제도를 관철시킨 점입니다. 거래가 투명해지면 뒷돈이 없어지고 부패가 사라지면서 더욱 기업이 발전하게 되는 것이지요."
 
박 고문의 기업관은 단순하면서도 분명했다. `기업은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라 사회의 공기(公器)다.` 그는 유서쓰기 운동에 참여해 유서 두 통을 미리 써놓고 있었다. 한 통은 유산 배분에 관한 것으로 3분의 1은 사회에, 3분의 1은 회사에, 나머지는 자식에게 물려준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통의 내용은 이렇다. "장기는 병원에 기증하고 유골은 평생을 바친 동해바다에 뿌려라."

  
☞박종규 고문은...

박종규 KSS해운 고문은 1961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국영기업인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해 10년동안 재직하면서 거의 우리나라 최초라 할 수 있는 우리사주조합 운동을 펼쳤다.
 
박 고문은 1970년 KSS해운을 설립, 이전까지 불모지였던 화학약품 등 특수화물 운송 분야에 뛰어들었다. 그는 우리나라 해운 산업의 태동기를 온 몸으로 부딪히며 해운산업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한국선주협회 부회장과 해무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아 일하면서 노사화합과 해운인력 양성 및 법제 개편 등을 주도했다.
 
뿐만 아니라 박 고문은 KSS해운을 `작지만 강한` 회사로 키워냈다. 업계에서 `작은 거인`로 불리는 KSS해운은 대형 가스선 분야에서 동남아 굴지의 선단을 갖추고 있으며, 외환위기 당시에도 연속 흑자를 기록할 정도로 탄탄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또 1995년부터 국내 유일의 남북 직항로 사업을 꾸준히 수행해오고 있다.
 
해운업계에 끼친 이같은 발자취에 더해 박 고문은 우리나라의 바람직한 경영자상을 만드는 데도 매진해왔다. 그는 과거 해운업계의 고질적인 병폐였던 `리베이트`와 밀수를 근절하는 데 선구자 역할을 해냈다. 회계결산도 직원들이 알아서 수행하도록 해 분식회계의 뿌리부터 근절했다. 아울러 본인 소유의 주식까지 출연해가며 우리사주조합을 결성했고, 경영권을 자식에게 세습하지 않고 굳건한 전문경영인 체제를 만들었다.
 
바른경제동인회 활동을 통해 기업의 신용카드 사용에 따른 세금공제 제도를 도입하는 데 앞장서며 바른 경영을 위한 사회적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유서쓰기 운동` 등 다양한 시민사회 활동을 펼쳤다. 현재도 규제개혁위원장으로 활동하며 기업활동을 뒷받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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