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머니투데이 박창욱 기자 | 2006.01.22 12:11

[영화속의 성공학]스물세번째 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 1.


"사랑이란 감정이 두려워 우린 늘 떨어져 있었다."(영화 '타락천사' 가운데)
"사랑은 사랑을 낳고 사랑의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낳는다."(영화 '동사서독' 가운데)

위에서 예로 두 편의 영화 모두 왕가위 감독이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왕 감독은 장르를 막론하고 자본주의의 효율성 논리가 지배하는, 그래서 인간에 배제된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고독과 소외를 일관되게 다뤄왔다고 본다.

고독과 소외라…. 이 두 가지 감정은 모두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물론 인간과 세계 및 우주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비롯되는 절대적인 고독이나 소외는 논외로 하자. '사람 인'(人)자의 형상이 말해주는 것처럼,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다.

그렇다면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어떤 식으로 이뤄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과연 이성적인 존재일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원인에 의해 맺어지는 걸까. 정말로 어려운 문제다. 이 대목에서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구스타트 융의 견해를 인용해보자.

# 2.

아, 긴장할 필요는 없다. 기자도 심리학도는 아닌지라 대학시절 입문서 정도를 읽었을 뿐이다. 전개를 위해 간단히 요점만 정리한다. 융은 인격이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뉜다고 봤다. 그리고 무의식은 경험에 바탕한 개인적 무의식과 유전적 성격이 강한 집단적 무의식으로 구분했다.

그런데 융은 인격에서 의식이 차지하는 비중을 매우 제한적이라고 봤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신들을 논리적·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세계에 의해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얘기다. 그런 무의식들이 모인 것이 '콤플렉스'이며 그런 비합리적인 요소들이 자체적으로 인격의 중요한 부분으로 작용하면서 우리들의 관계나 행동을 좌우하게 된다.

(여기서 잠깐.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잠깐 더 샛길로 새겠다. 융과 관련해 새로 관심에 들어온 책이 있다. 심리학을 전공한 지인이 최근 추천해줬다. '티벳 사자의 서'라는 책이다. 시인 류시화의 번역본(정신세계사)이 시중에 나와 있단다. 20세기 천재 가운데 하나인 융이 서재에 꽂아두고 늘 탐독했다고 한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산 자에 인간에 대한 심오한 가르침이 담겨있다는 지인의 소개에 읽어보고 싶은 구미가 당겼다. 어려운 책이지만 용기를 내서 곧 도전해 볼 참이다)

동양 고전을 정리한 책 '강의'의 저자인 신영복 교수도 최근 열린 머니투데이 포럼을 통해 "자신에 관해 제대로 성찰하지 못한다면 자신 속의 콤플렉스가 자신의 의사 결정을 좌우하게 된다. 이것은 정말로 무서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모르는 나 자신의 세계가 그토록 많을진데, 어떻게 자기에 대해 발견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신 교수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찾으라"는 답을 줬다. 그는 "사람은 자신이 만난 모든 사람과 관계에 의해 좌우된다"며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가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이라고 했다. 현대사회는 자신을 확대·증식하는 자본주의의 논리만 존재할 뿐, 사람과의 만남이 사라지고 있으며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고독과 소외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끼리 만남이라는 가르침이다.

# 3.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엔 만남이 있다. 사랑의 감정이 싹 튼 남자와 여자와의 만남이다.

물론 그 만남엔 아무런 목적이나 이유가 없다. 그저 만남일 뿐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다.


사진사 정원은 시한부 인생이다. 담담하고 일상적인 시간을 보내며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선 감정이 잘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자신이 떠나면 홀로 남겨질 아버지에 대해선 그러지 못한다. 비디오 사용법을 알려줬음에도 익숙하지 못한 아버지에게 화를 낸다. 자신보다는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때문에 힘겨워 한다.

독재정권에 의해 20년간 감옥 생활을 한 신영복 선생은 수감자들을 힘겹게 하는 건 육체적 고통이 전부가 아니라고 했다. 대부분 감옥 바깥에 남겨진 가족들에 대한 걱정에 괴로워한다고 했다. 나라는 존재의 의미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다.

다림은 사진을 맡기러 정원에게 왔다가 지친 일상 생활에서 일어났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모두 정원에게 털어놓는다. 정원은 그저 웃으며 그 이야기를 모두 들어 줄 뿐이다. 그러면서 다림은 정원을 점점 사랑하게 된다.

한 눈에 반한 건 아니지만 다림은 점점 정원에게 젖어들어 간다. 그와의 만남에서 자신의 존재를 느꼈고 이를 통해 만족과 편안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는 정원에게 믿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림은 정원과 만남을 통해 일상의 권태를 사랑과 맞바꾼다.

"내 기억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잘 알려진 정원의 영화 속 독백이다.

정원은 다림을 멀리서 지켜볼 뿐, 다림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한 위로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환한 다림의 웃음에서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살다간 의미를 찾을 뿐이다. 정원은 다림과 만남을 통해 삶에 대한 아쉬움을 영원한 사랑의 기억과 맞바꾼다.

# 4.

사실 요즘 사회는 정말로 치열하다. 경쟁과 이기심으로 충만한 세상이다. 이기거나 지거나, 지배하거나 지배당하거나 할 뿐이다. 주는 것엔 인색하면서 받는 것에만 익숙하다. 자신을 받아들이라 강요하지만 상대방을 인정하진 않는다. 특정한 목적이 없다면 만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래선 관계가 생길 수 없다. 당연히 사랑도 없다.

그렇게 살지 말자. 함께 어울리고 대화하고 정을 나누며 살자. 그러면 자연스레 인생의 목적이 생기고 삶의 방법도 찾게 된다. 사랑하게 되면서 사는 의미가 생기게 된다.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이 자체만으로도 이미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싶다.

천국과 지옥에 관한 우화 하나를 소개하며 글을 맺을까 한다. 어떤 사람이 죽어 지옥에 가게 됐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맛있는 음식이 가득 있지 않은가. 하지만 자신의 팔 길이보다 긴 젓가락만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기위해 애를 쓰지만 도무지 먹을 수 없어 고통스러워 한다.

그는 천국이라면 과연 어떨지 궁금했다. 잠깐이나마 천국을 구경할 수 있게 해달라고 신에게 부탁했다. 허락을 얻는 그는 천국에 가보고 놀랐다. 지옥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음식이 가득했고 마찬가지로 긴 젓가락만으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규칙은 같았다. 하지만 천국 사람들의 표정은 무척 밝았고 행복해보였다.

그들은 긴 젓가락으로 서로 서로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여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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