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사건' 사실과 진실의 차이는?

김소희 말콤브릿지 대표 | 2005.12.13 12:26

[패션으로 본 세상]

'사실'과 '진실'의 차이는 무엇일까. 엄연히 실재하고, 거짓이 아닌 것들. 이것들은 모두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사실은 과연 진실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낱낱한 사실의 나열이 '진실'로 둔갑할 수는 없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좋은 동화들로부터 이러한 차이를 배워왔다. 6명의 장님 앞에 코끼리가 나타났다고 하자.

그들은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각자 다가가 만져보기로 했다. 먼저 코끼리의 옆구리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는 벽과 같이 생겼다'고 말했다.

상아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는 창과 같인 생겼다'고 했고, 귀를 만진 사람은 '부채', 다리를 만진 사람은 '기둥'이라고 코끼리를 정의했다.

장님들은 하루 종일 다투었다. 그들이 서로 양보할 수 없었던 이유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실'들이 각자에게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확보한 사실이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미약한 일부임을 의심하지 못했다.

또한 그들은 모두 코끼리를 볼 수 없으니 스스로 자신의 얘기를 검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누가 그들에게 코끼리의 모습을 제대로 알려줄 수 있을까. 그러나 이들에게 실제 코끼리의 모양새를 검증해준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상상해보자.

우리는 우선 장님 6명을 한날 한시에 같은 장소에 모이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되도록이면 그 때 그들이 만졌던 것과 유사한 크기의 코끼리를 파악하여 그 장소로 데려와야 한다.

또 이들이 충분히 코끼리의 부분 부분을 만져볼 수 있도록 넉넉한 시간을 주고, 그 동안 코끼리가 자세를 바꾸지 않도록 철저히 코끼리의 움직임을 통제해야 한다. 그래도 어떤 마음 좋은 사람이 검증의 자리를 마련하여 기꺼이 수고하기로 자청했다고 하자.

충분한 시간이 지난 뒤 장님들이 코끼리의 모습을 파악하게 되었을 때, 이들은 다른 장님들에게 그 결과를 어떻게 이야기해 줄까. 그들 모두가 코끼리의 생김새를 있는 그대로 전하게 된다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어디 세상이 그렇기만 할까.

만약 자신이 고집했던 부분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조금씩 또 다른 얘기를 하게 된다면, 또한 6명이 모두 이 쪽팔리는 코끼리 소동 자체가 유야무야 되기를 바란다면, 그들은 다음과 같이 입을 모아 얘기할 지도 모른다.

'아~ 코끼리를 가져다 놓고 실험이란 걸 해봤는데, 실험이 좀 그렇더라고. 지난번에 우리가 만졌던 거랑은 조금 다른 것도 같고. 아무튼 코끼리라는 건 쉽게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아.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가 말했던 건 다 사실이라는 점이야. 이봐, 그렇지?'

'황우석 사태'가 시간이 지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황우석 교수가 서울대에 직접 재검증을 요청했다고 한다. 장님인 나는, 재검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도, 또한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결과를 똑바로 읽는 눈이 내게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나는 그 때도 누군가의 입을 통해 재검증 결과를 들어야만 한다. 그런데 만약 재검증을 지켜보고 그 결과를 나에게 말해주는 사람을 믿을 수 없다면, 진실은 어디서 찾아지는 것일까.


마케팅 연출가인 크리스티앙 미쿤다(Chrstian Mikunda)는 세상이란 이중바닥 구조로 되어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보이는 바닥'의 세상과 '보이지 않는 바닥'의 세상을 동시에 살아간다.

'보이지 않는 바닥'에는 여러가지 것들이 침전되어 있다. 무언가 가려진 비리들, 밝혀지지 않은 의문들도 가라앉아 있지만, 이와 함께 예의라든가, 상식, 선입견들, 즉, 쉽게 말할 수 없지만 오랜 시간 공유되어온 것들도 같이 가라앉아 있다.

가려진 인권의 그늘이나, 도청 비리 등을 용감히 파헤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바닥에 뛰어들어 불순물을 찾아낸다. 이들은 어려운 일을 해냈고, 그들이 밝혀낸 진실은 의미있다.

그러나 어떤 못생긴 여자가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그녀에게 다가가 '당신 참 못생겼소'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이 사람 역시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는 점에서 가치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는 그저 보이지 않는 바닥의 엉뚱한 부분을 건드린 무례한일 뿐이다.

보이지 않는 바닥에 접근할 때에는 무엇보다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제약회사들은 많이 복용할 경우 극약이 될 수도 있는 물질들도 약을 제조하기 위해 사용한다. 이 불가피한 사용을 위해 우리는 '약전'을 만들고 어느 물질은 어느 이하로만 사용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 약전에 대한 약속이 너무도 익숙하고 익숙하여, 어느 날은 더 이상의 논쟁이 필요없는 보이지 않는 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렸을 때, 누군가 어느 회사의 약을 손에 쥐고 '이 약에는 독극물이 들어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의 말은 사실이지만 진실에서는 너무도 멀찍이 떨어진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대답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보이지 않는 바닥에서 그 구구한 과정을 다 끄집어 내어 말한다는 것은 매우 난감하고 어려울 수도 있다.

진실을 보는 눈도 중요하겠지만, 파장을 제대로 예측하는 힘이야 말로 언론기관이 결코 잃어서는 안될 귀중한 안목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취재에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엠바고라는 약속을 지켜오는게 아닌가.

어쨌거나 이제 재검증의 결과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결과는 어떠한 파장을 낳게 될까. 앞으로 우리 대학에서는 모든 학사, 석박사의 논문들이 심사될 때, 학생들이 제출한 데이터와 사진만으로는 심사하기 불충분하므로, 담당교수들이 모두 새로운 데이터로써 재검증을 하는 새로운 관행이 생겨날 수도 있다.

담당교수들이 논문을 읽어보는 것만으로는 타당성을 평가할 능력들이 없을 수 있으므로, 우리는 어렵더라도 이 길을 가야할 지 모른다. 이런 변화가 한국의 과학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이번 사태의 가장 큰 문제는 진실 이전에, 재검증의 결과 이전에, 이런 문제들이 충분히 고민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어떠한 변화는 폭로만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대해 매우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설득해나가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우리가 접근하고자 하는 진실이, 세상을 바람직하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부디 재검증의 과정과 이를 외화하는 과정에는 보다 깊이있는 신중함이 있었으면 한다. 사회적, 국제적 파장과 포퓰리즘에 대한 안배를 무시한다면, 그에게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할 자격이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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