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머니투데이 박창욱 기자 | 2005.04.01 12:43

[영화속의 성공학]고단한 삶속에서도 결코 잃지 않은 따뜻한 사랑

편집자주 | 영화 속 이야기는 물론 현실속에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거기엔 세상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온갖 일들이 오롯이 녹아있지요. 이에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삶의 모습속에서 참된 삶과 진정한 성공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함께 가져보고자 합니다.

무덥던 지난해 여름 어느 토요일 오후. 내 인생에서 꼽을 만한 영화 한편을 만났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이란 영화다. 쿠르드족 감독이 만든 최초의 작품.

온통 블록버스터가 판치던 성수기 극장가에 달랑 한 곳에서만 외롭게 둥지를 튼 작가주의 영화였다.

아, 벌써 누군가는 하품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 류의 예술영화 얘기는 재미없다는 불평을 내 뱉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된다. 맑은 눈빛을 가진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다.

비록 가난한 아이들의 삶이 줄거리이고 너무나 슬프고 처연하기까지한 현실을 그리고 있긴 하지만, 이 영화는 세상 그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답다.

ㅇ…영화에서 '리얼리즘'이란 용어는 그것의 사전적인 의미와는 좀 다르게 와 닿는다. 사실적인 리얼리즘 영화들은 막상 관객에겐 그다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보기에 영 거슬리기까지 하다. 세상에 있는 사실을 그대로 묘사했는데 왜 부담스럽고 불편한 걸까.

자주 접하는 대부분 상업 영화들이 '꿈'을 얘기해 주기 때문이다. 상업 영화들은 일상과 다른 상상의 세계에 빠져들게 해준다. 피곤에 쩔어 만원버스에 시달리거나, 상사의 호통에 남몰래 울분을 삭히는 일 따윈 잊어도 좋다. 대신 영화에선 바라만 봐도 멋진 왕자님과 우아한 궁전에서 진수성찬을 즐길 수 있다. 또 엄청난 힘을 가진 영웅이 돼서 세상을 구해낼 수도 있다.

실제론 이루지 못하는 그런 일들이 나와야 사람들은 비로소 만족한다. 그렇다. 영화에서는 그런 것들이 오히려 더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대리만족의 달콤함. 그래서 막상 영화가 실제 세상을 그대로 담아내면 불편해진다. 그러나 꿈은 역시 꿈일 뿐이다. 아무리 멋진 꿈일지라도 깨고 나면 허무해지기 마련이다. 일시적인 쾌락의 한계.

역설적으로 리얼리즘 영화가 주는 덕목은 보기에 불편하다는 사실에 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지금의 현실을 좀 더 낫게 해보려는 에너지를 불타오르게 한다. 단지 영화속에서만 꿈꾸는 것이 아니라, 그 꿈을 실현시키려는 욕망을 가지게 해준다. 대부분 사회고발 영화들이 리얼리즘 형식을 띄게 되는 이유다.

ㅇ…영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은 리얼리즘 부류에 속하는 영화다. 건조한 영상은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같기도 하다. 영화는 가난한 쿠르드족 아이들의 고단한 삶을 담담히 그려낸다. 배우들도 실제 쿠르드족 아이들이다. 그래서 영화는 오히려 눈물 한 방울도 흘릴 수 없게 만든다. 그들의 험난하고 고된 생활이 주는 처연한 실제 삶의 슬픔을 감히 내 카타르시스의 소도구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던가.


차라리 완전한 허구라면 마음껏 울며 즐길(?) 수도 있을텐테 말이다. "인생이란 놈은 나를 산과 계곡으로 떠돌게 하고, 나이들게 하면서 저승으로 이끄네." 아이들이 악을 쓰듯 차속에서 부르는 노래 가사다. 이게 과연 아이들이 부를 노래가사인가. 이런 노래가 나오는 영화를 보며 과연 눈물이 나올 수 있을까. 감히 누가 누구를 동정할 수 있단 말이던가.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적어도 정치성을 띄고 있어 보이진 않는다. 말그대로 아이들을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가난한 나라에서 어린이의 노동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찰로 읽혀지기도 한다. 하지만 내 견해로는 적어도 이 영화는 큰 정치적 주장을 담고 있다.

이란의 첫번째 쿠르드족 감독인 바흐만 고바디는 '쿠르드족의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오랜 민족의 숙원을 에둘러 표현해 낸다. 쿠르드족은 중동의 각 나라에 퍼져 살며 자신들의 독립된 국가를 가지지 못했다. 때문에 엄청난 박해를 당했다. 그래서 자치권을 획득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감독은 영화에서 자신의 민족에 대한 드높은 자부심을 드러낸다. 그 지독한 가난에서도, 엄마 아빠가 없는 고달픈 현실에서도, 아이들은 절대 희망을 잃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삶의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이 바로 쿠르드족의 면모라는 것을, 그래서 비록 가난하지만 (독립국가를 이룰만한) 높은 정신세계를 가진 민족이라는 주장을 담아내고 있다.

ㅇ…얘기가 옆으로 많이 샜다. 이젠 영화 자체만을 들여다 보자. 바흐만 고바디 감독은 이젠 거장으로 칭송받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에게 영화를 배웠다. 그러나 스승의 스타일까지 오롯이 닮아가진 않았다. 조훈현에게 배운 이창호가 전혀 다른 스타일의 바둑을 두는 것과 마찬가지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이란의 가난한 일상에서 착한 서정성을 비단처럼 뽑아냈다. 친구의 노트를 돌려주기 위해 마을을 헤메는 착한 아이의 마음씨(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나 대지진 이후 예전 영화에 출연했던 아이들을 걱정하며 찾아나서는 영화감독(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지순한 젊은 남녀의 사랑이야기(올리브 나무 사이로) 등에서 그는 가난한 현실속의 아름다움을 사실적이고 담담하게 그려낸다.

반면 고바디 감독에겐 현실이란 그저 현실일 뿐이다. 그가 보여주는 가난한 일상의 생생한 묘사는 그다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서러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힘든 일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모습은 신선한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그는 아름다움을 영화 자체에 담아놓기 보단 우리들의 마음속에 던져 놓았다.

영화는 줄거리를 다 말해도 보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엄마는 막내를 낳다 죽고, 아빠는 사고로 죽고, 그렇게 남겨진 5남매의 사는 이야기다. 그렇게 힘든 속에서도 아이들은 늘 안아주고 서로서로 뽀뽀해준다. 불치병에 걸린 장애인 동생을 수술시키려고 큰 누나는 팔려서 시집간다. 동생이면서도 실질적인 장남은 밀수무역에 짐꾼노릇을 하며 벌이에 여념이 없다. 어린누이는 장애인 오빠를 안고, 아빠 무덤에 가서 낫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렇게 힘든 생활속에서도 아이들은 서로 사랑하고, 각자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했다. 건조한 일상에서도 아이들의 마음은 결코 메마르지 않았다. 자기를 희생하고, 작은 것이라도 나누며 서로를 아꼈다. 따뜻하고 포근한 마음씨였다. 훨씬 풍족하지만 훨씬 더 건조했던 나의 일상에 이 영화는 그렇게 작은 등불이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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