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투철한 애국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파쇼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과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아쉬움, 전쟁에 대한 아픈 기억에 극심한 혼란을 느낀다. 결국 그는 스스로 인간이길 거부하고 돼지로 변해버린다.
아나키즘은 흔히 '무정부주의'로 번역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프루동 이후 근대 아나키스트들이 급진적인 정치·사회운동의 행동양식을 보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철학사가 장 프레포지에는 보다 근본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프레포지에의 저서 '아나키즘의 역사'에 따르면 아나키즘은 하나의 행동양식이다.
그 역사적 연원은 견유학파 철학자인 디오게네스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엄청난 권력을 가진 알렉산더 대왕이 "원하는 걸 다들어줄 테니 말해보라"고 하니, "햇빛 가리니까 내 앞에서 비껴달라"고 한마디 멋지게 날렸다는 바로 그 사람 말이다. 따라서 아나키즘을 그저 단순히 무정부주의로만 해석하는 건, 그 의미를 굉장히 축소시키는 일이 된다.
"나에게 아나키즘은 분류와 정의가 가능한 정치적 태도이기 앞서, 본질적으로 정신 또는 세계에서 하나의 존재 방식이다. 여기에 아나키즘의 취약성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이점으로 인해 아나키즘은 그 영속성을 보장받으리라고 확신한다"(아나키즘의 역사 중에서)
다시 말해 아나키즘을 모든 종류의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에 대한 의지'라고 해석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영화 '붉은 돼지'의 가장 큰 매력은 유럽의 풍광도, 멋들어진 음악도, 잘 짜여진 재미난 스토리도 아니다. 바로 낭만적인 아나키즘이다.
물론 여기서 아나키즘은 과격한 정치적 행동양식으로서 의미가 아니라, 자유에 대한 인간의 의지를 뜻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대한 열정, 인간에 대한 애정(어떤 종류의 것이든 간에), 자연과의 동화, 얽매이지 않는 생각 등등.
현실속 우리들이야 영화속 주인공처럼 살 순 없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라도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는 '아나키스트'가 한번 되어 보는 건 어떨까. 승진, 부, 명예, 권력 이런 것들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나 보잔 얘기다.
아니, 그렇게 중요한 것들을 어떻게 포기하고 사냐구. 사실 세상은 대체로 공평하다. 포기하는 것의 중요성만큼, 때론 그 이상으로 훨씬 더 소중한 것이 자신도 모르는 새 스스르 옆에 다가와 자리잡고 있을 거라 믿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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