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홀대받던 3류서 World Top으로

성화용 기자, 뉴욕=최명용 기자 | 2004.11.16 11:19

[경제기행]삼성<19ㆍ끝>뉴욕 퍼포먼스-10년만에 세계에 우뚝서다

뉴욕 JFK공항. 입국 수속 대기열에서 삼성 광고판이 보였다. 삼성의 이미지 광고 뒤편으로 비자카드 광고가 있었고 그 옆으로 보이는 시계탑 광고는 롤렉스가 차지했다. 삼성은 이코노미 클래스에 지치고 성가신 입국심사에 위축된 답사자에게 힘을 불어 넣었다.

삼성 답사의 종착역으로 뉴욕을 선택하면서도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과연 세계의 경제수도 뉴욕에서 삼성을 느낄 수 있을까. 그저 그런 '그들 중의 하나(one of them)'을 잔뜩 과장하느라 고민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러나 삼성은 기대 이상이었다.

뉴욕의 명물 타임스퀘어로 향했다. 브로드 웨이 7번가와 42번가가 교차하는 곳. 미국에서 가장 번화하고 분주한 문화·유흥의 중심. 타임스퀘어에서도 가장 비싼 곳의 광고탑을 삼성이 차지하고 있었다. 코카콜라와 HSBC, 푸르덴셜과 함께 나눠 가진 브로드웨이의 광고판이 삼성의 현재를 상징했다.

별표국수와 사이다를 만들던 그 옛적 삼성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 뉴욕이라는 고압적인 도시에서 오연히 고개를 들고 서 있었다.

'질(質)경영' '신(新)경영'은 팸플릿에 담긴 홍보 문구 정도에 불과했다. 삼성 근방을 오랜 기간 맴돌며 접한 숱한 수사(修辭)들은 가슴에 와 닿지 않았었다.

디자인 혁명으로 일본을 따라잡았다고 할 때도, 유럽시장에서 최고급 소비자들을 사로잡고 있다고 할 때도 그저 그러려니 했다. 2년연속 '글로벌 초일류기업'을 목표로 경영방침을 정했다고 했을 때, 지난해 삼성전자의 순익이 일본의 상위 7사(전자 관련)를 합한 것보다 더 많다고 했을 때 역시 '그런가…'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근사한 무대에 올려진 삼성의 퍼포먼스는 감동적이었다. 문자의 힘을 압도하는 강렬한 느낌과 긴 여운. 삼성 홍보팀이 아무리 전하려고 애를 써도 몇 줄, 몇 페이지의 글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삼성의 오늘'을 타임스퀘어에서 느낄 수 있었다.

◆세계 3류에서 10년만에 톱 브랜드로

1993년 3월 LA를 방문한 이건희 회장은 백화점과 할인매장 한 구석에서 먼지만 쌓여 있는 삼성의 전자제품을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함께 방문한 사장단의 표정도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이 회장은 당장 현지에서 연회장을 빌려 삼성 제품과 일본 제품을 비교해 전시하고 사장단 합동교육을 시켰다. '국내 1류, 세계3류'의 현장에 무거운 한숨소리가 가득 찼다. 삼성의 변신은 이 때부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11년이 흐른 2004년 10월의 뉴욕. 5번가에 있는 미국 최대의 가전대리점 베스트바이를 찾았다. 1층은 소모품, 지하 1층에 생활가전에 전시돼 있었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양 옆으로 삼성의 양문형 냉장고가 전시돼 눈길을 끌었고 안쪽 TV 진열대에는 삼성과 소니, 필립스가 비슷한 비중으로 나란히 있었다.

점원에게 전시장 사진을 찍겠다고 했더니 재니터(관리인)에게 물어보겠다고 했고, 뒤이어 재니터는 다시 상급 관리자에게 허락을 구해야 한다고 했다. 함께 찾은 삼성 사람이 명함을 쥐어 주며 양해를 구했더니 즉석에서 오케이.

"삼성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이 어떠냐"고 물었다. 재니터는 "삼성과 같은 일류 브랜드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삼성은 확실히 일류 대우를 받았다. 제품이 전시된 위치와 비중, 가격을 봐도 그랬고 매장을 찾는 소비자들의 시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무용품 전문상가 오피스디포(OFFICE DEPOT)에 충전기를 사러 갔다. 삼성의 핸드폰 충전기가 노키아나 모토롤라보다 더 많이 진열돼 있었다.

신문 광고엔 'CINGULAR'라는 이통사 광고가 많이 실리는데, 이 회사 대리점에서 내놓는 핸드폰이 주로 삼성과 노키아라고 했다. 뉴요커들이 찾는 휴대폰은 우리 기준으로는 구형이었다. 삼성의 신제품은 뉴욕의 소비자를 기준으로 2세대 정도 싸이클이 앞선 최고급 브랜드라고 했다.

격세지감. 11년전의 3류는 이제 1류 가운데서도 상위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뉴욕 뿐 아니라 씨애틀과 뉴저지에서 교포들은 침이 마르도록 삼성을, 국내 기업을 칭찬했다. 매일 삼성의 광고를 보면서도 매일 감격에 젖는다고 했다. 그나마 한국 기업들이 위안을 준다고, 이렇게 해외에 나와 보지 않으면 모를 거라고 했다.

◆세계를 향해 기업을 열다


지난 6월19일. 타임스퀘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뉴욕 메리어트 호텔. 아테네 올림픽 성화봉송 주자로 참여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소감을 밝혔다.

전자대리점의 점원에서부터 장애인 스키 선수, 아동복지사업가에 이르기 까지 온라인 컨테스트를 통해 주자로 뽑힌 미국인들은 한결같이 삼성에 감사한다고 말을 맺었다.

코카콜라가 독점하던 성화봉송 행사에 처음으로 끼어든 삼성이 주자들과 귀빈을 초청해 만찬 행사를 여는 자리 였다.


마지막 성화봉송 주자를 보기 위해 몰려든 타임스퀘어의 수만 인파, 그들의 손에서 펄럭이는 삼성과 코카콜라 로고가 새겨진 깃발. 행사를 준비했던 삼성의 한 실무자는 "사람들을 내려다 보는데 문득 눈물이 흘러 내렸다"고 했다.

6월6일 도쿄 황창규 반도체 총괄 사장, 7일 서울 이현봉 국내영업사업부 총괄사장, 9일 베이징 이기태 정보통신총괄 사장, 19일 뉴욕 최지성 디지털미디어 총괄사장, 24일 스위스 로잔 이윤우 부회장, 12일 아테네 윤종용 부회장.

삼성의 스타급 CEO들이 성화봉송 주자로 총출동한 대장정. 성화가 시드니와 서울, 뉴욕을 거쳐 27개국 34개 도시, 7만8000Km를 달리는 내내 삼성은 이벤트에 참여한 5500만명의 세계인들과 함께 했다. 삼성이 연출한 한편의 드라마였다. 삼성은 스스로의 저력에 놀라워 했다

올림픽 마케팅에 힘을 모으는 와중에서도 삼성의 글로벌 네트워크는 각자의 사업으로 분주했다. 이틀이 멀다하고 삼성 관련 뉴스는 세계 시장에 타전됐다.

6월21일. 삼성전자는 필리핀을 시작으로 한달간 동남아 7개국을 순회하는 AV로드쇼를 시작했다. 같은 달 27일 우크라이나에서는 삼성 주최의 대규모 투어 콘서트가 시작돼 50여만의 인파를 모았다.

7월7일. 삼성전자는 멕시코 카레이싱 대회인 '코파 코로나 2004'를 후원한다고 밝혔다.

7월 9일. 미국의 격주간 경제주간지 포브스(Forbes)에 게재되는 '삼성의 다음 행보(Samsung's Next Act)'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가 미리 소개돼 눈길을 끌었다. 18일에는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이 3개부처 장관을 대동하고 브라질 상파울루주(州)에 있는 삼성 캄피나스 휴대폰 공장을 방문했다.

이어 23일에는 세계 100대 브랜드 가운데 삼성이 지난해 보다 4계단 상승한 21위에 올랐다고 세계 최대 브랜드 컨설팅 업체인 인터브랜드와 미국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가 발표했다.

삼성은 세계 곳곳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굳이 올림픽이 아니어도 이미 삼성은 세계의 중심에 서서 세계를 향해 열려 있었다.

◆ '글로벌 초일류'의 진입로에 서서


삼성이 해외에서 채용한 현지 인력만 7만5000여명, '세계 최고'라고 내걸 만한 제품만 20여개에 이른다. '삼성이 하면 다르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익숙해져 가고 있다.

최근 삼성은 동아프리카의 탄자니아와 케냐 정부의 초청을 받아 현지 관료와 기업인을 모아 놓고 신경영을 강의 했다.

맨하탄의 오성급 만다린 호텔 객실에는 삼성의 디지털 TV가 놓여있다. 베이징, 토론토, 런던 피카딜리 광장에 삼성이 있다. 칠레와 뉴질랜드를 가도 삼성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60개국 340개의 해외 거점이 세계를 뒤덮고 있다.

뉴욕의 삼성을 눈으로 확인하고 삼성 답사가 과거 시제에 너무 매달렸던 것 아니냐는 후회가 밀려왔다. '세계기업 삼성'에 축약된 근현대 한국경제사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으려 했지만 아쉬움은 떨쳐지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중교리에서 사업가로서의 삶을 결의했던 창업자 이병철은 50년 사업력 내내 숱한 질곡을 거쳐 삼성을 한국 제일로 키웠다. 다른 대부분의 그 시대 기업들 처럼 타협도, 유착도 있었고 그 이상의 도전으로 벽을 뛰어 넘기도 했다. 경영을 이어받은 이건희 회장은 삼성을 국내 제일에서 세계 제일의 진입로 까지 끌어올렸다.

이렇게 삼성은 세월을 밟고 화려한 오늘에 이르렀지만 '글로벌 초일류'의 길 위에 서있는 지금도 어깨가 가볍지 않아 보인다.

한 나라 경제의 1할 또는 2할을 등에 지고 있다는 둔중한 부담감. 불안정한 소유·지배구조. 오너 일가에 대한 사회의 관심과 집착. 무노조 또는 비노조의 효율과 한계. 이 모든 것에 대한 비난과 찬사의 불균형.

앞으로의 스토리는 이 짐들을 적당히 내려놓으며, 때로 새로운 짐들을 짊어지며 전적으로 삼성이 써내려 갈 뿐이다. 의령, 진주, 마산, 대구, 구미, 기흥, 탕정, 용인, 타임스퀘어에 이르는 긴 여정에 숱한 영욕의 사연들을 새겨놓은 것 처럼 말이다.

<경제 기행 1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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