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300석 종자돈을 찾아서

머니투데이 성화용 기자 | 2004.09.21 10:21

[경제기행]삼성, 중교리에서 타임스퀘어까지 ①

그 날, 골패 노름에 지칠대로 지친 청년 이병철은 달 그림자를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다가 잠시 이 골목을 서성거렸으리라.

26세. 서울 중동 중학과 일본 와세다 대학을 모두 중퇴하고 하릴 없이 집안의 재산만 축내던 한량 시절.

조혼으로 얻은 세 아이에 대한 애정 만큼이나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장래에 대한 불안감의 무게도 커졌지만 도무지 공부는 성에 차지 않아 접었고 마땅히 할 일도 찾지 못했던 실의(失意)의 나날이었다.

그의 각성은 이렇게 암울했던 수년간의 좌절을 거쳐 고향 마을 분가해 살던 옛 집에서 문득 이뤄진다.

너무 허송세월했다. 뜻을 세워야 한다. 70년전 그 날 노름에 지친 몸을 뉘이고도 한 동안 잠을 못 이루던 이병철은 마침내 사업 투신을 결의한다.

그러나 그 때 어찌 짐작이나 했으랴. 외길 50년 사업가로서의 삶이 그토록 고단하고 파란만장하리라는 것을.

호암, 회색빛 낭인시대를 보내다

몇 차례 숙독으로 거의 외다시피 한 호암(湖巖·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의 호)자전(自傳)의 한 장면을 속으로 되뇌이며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그의 생가(生家)와 결혼 후 분가해 살던 옛 집이 있는 그 곳을 찾았다.

9월 중순인데도 밤이 습하고 더웠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중교리의 정곡면사무소 앞을 맴돌다가 동네 사람들이 '별장'이라고 부르는 호암의 옛 집으로 향하는 골목 어귀쯤에서 다시 그의 자취를 더듬었다.



외등 몇 개가 들어와 있지만 마을은 외지인의 발길을 쉬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완고한 어둠에 둘러 싸여 있었다. 사업가로 뜻을 세운 그날 밤에도 호암은 노름에 지쳐 이 시간쯤 이 길로 집에 들어섰으리라.

세월이 흐르고 6.25 전화(戰禍)를 겪으면서 마을 모습이 달라지긴 했지만 골목이며 집터는 그대로 라고 했다. 호암은 집에 들어가기 전에 여기 쯤에서 잠시 망설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골목의 이정표쯤 되는 작은 식료품점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는 당시 자신의 마음속으로부터 답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고답적인 유학생활과 풍족한 가산(家産)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던 그 무엇. 과연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서도, 유학을 중단하고 돌아온 후 선친이 부쳐주는 송금으로 다시 2년의 서울 생활을 하면서도 스스로를 향한 질문이 머리속을 맴돌았다. 고향집에 다시 돌아와 방황하던 그는 어느 날 벼락을 맞은 듯 '사업을 하자'고 결의한다.

호암이 사업을 하고 싶어했던 흔적은 유학시절과 서울 외유시절 여러 곳에서 발견되지만 그 때까지도 '모티브'가 없었다. 30여명의 머슴을 둔 부농 지주의 자식으로 경제적인 동기가 절박하지 않았고 향리의 유교문화도 그의 정신세계를 제약했다.

결국 그에게 사업가로서의 동기를 부여한 건 실의와 좌절의 세월이 아니었을까. 부지불식간 내 사업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쌓아둔 채 분출하지 못하다가 이 곳 중교리에서 마음속에 남은 최후의 벽을 깨기 위해 절박한 방황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호암은 자전을 통해 "일본 유학후 돌아와 선친께 말씀드려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노비해방'을 시켰던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마땅한 기억이 없다"고 회고하고 있다. (당시의 노비관련 문서 사진)

남강 지류의 평범한 농향

다음 날 다시 찾은 중교리는 생각보다 훨씬 작은 마을이었다. 의령읍에서 창녕방면 20번 도로를 타고 10분쯤 달렸다. 야트막한 산들로 켜켜이 둘러 싸인 흔한 농촌마을 풍경이 이어졌다.

남강 지류가 훤히 보이는 제법 높아 보이는 고갯길을 넘자 마자 정곡면 이정표. 대밭과 상수리 나무가 어우러져 한가로워 보이는 길을 차로 2~3분 더 가면 중교3거리가 나온다. 왼쪽에 마을이 있다. 그저 안내인을 따라왔던 중교리의 전날 밤 풍경과는 너무도 다르게 느껴졌다.

면사무소 직원 말로는 40여호 된다고 했는데 실제로 세어 보지는 않았다. 작은 마을이지만 왕복 2차선의 아스팔트 도로변에는 다방도 있고 음식점도 있다. 더 눈에 띄는 건 삼성(SAMSUNG)로고가 간판에 새겨진 '삼성 정곡판매센터'. (사진)




대리점 같지는 않은데 도대체 뭘 파는 곳일까. 구형 텔레비전 몇대와 비디오레코더, 무선 전화기 정도가 진열돼 있다. 낮인데도 주인은 자리를 비웠다. 장사가 될 만한 곳이 아닌데 삼성 간판이 걸려있으니, 그나마 호암의 고향마을을 뜻하는 상징물쯤 되는 것인가.

답(沓) 삼백석은 옛적 그대로인데…

호암이 태어났다는 생가는 집이 너무 낡아 고치는 중이라고 했다. 그 맞은 편 결혼 후 분가해 살던 집은 60년대에 보수해 새로 지은 안채가 잘 보존돼 있었다. 안채를 바라보고 왼쪽편의 건물 한동은 소실된 채 빈터로 남아 정원으로 꾸며졌다.

대문에 붙어있는 사랑채에는 관리인이 살고 있다. 지난 1972년부터 사랑채에 머물고 있는 성창섭씨는 "선대회장(호암)님은 1960년대에 안채를 중수하고 나서 들르신 후 생전에 한번도 안 오셨다"며 "(내 기억에)이건희 회장님도 들르신 적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면사무소 직원의 안내로 호암의 중교리 시절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이판규(69)씨를 만났다. 중교리는 호암의 가계인 경주 이(李)씨의 집성촌이다. 호암이 젊은 시절을 보냈던 일제 때는 100여세대 300여명의 일족이 모여 살았지만 지금은 15세대가 남아있다고 한다. 이판규씨 자신이 호암의 8촌 동생이며 남아있는 이씨들이 모두 20촌 이내의 가깝다면 가까운 문중 사람들이란다.

이씨는 "당시나 지금이나 중교리 땅의 8할은 그 집안 소유"라고 했다. 호암도 자서전을 통해 조부때 가산이 1000여석으로 늘었으며 사업을 결심한 후 선친으로부터 사업자금으로 300석을 떼어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과연 1000여석 소출이 가능한지 몇몇 주민들에게 물어봤다. 50대의 면사무소 직원은 "일제 때 의령에서 부농으로 꼽히던 사람들이래야 대개 500석 안팎이었다고 옛 어른들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판규씨는 "당시 그 집안에서는 중교리 뿐 아니라 함안에도 땅을 꽤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흉년에도 1000석이 넘는다고 했다"고 엇갈린 얘기를 내놓았다.

500석이든 1000석이든 호암의 가재(家財)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지금의 화폐가치로 환산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호암 스스로는 분재(分財)받은 300석에 대해 "먹고 살기는 넉넉하나 사업자금으로는 대수로운 것이 못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300석의 사업자금. 삼성그룹을 일으킨 종잣돈이다. 궁금증을 풀기 위한 탐문 끝에 '여기쯤 될 것'이라는 증언을 따라 마을 앞 지방도로를 따라 펼쳐진 논 주변을 둘러 봤다. (사진)



마을을 등지고 서서 오른쪽 끝에 자그마한 동산, 맞은 편으로는 지리산의 지맥이라는 마두산 줄기, 그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 남강 줄기가 뻗어 있었다.

70년전 이 땅에서 난 곡식 낟알이 삼성의 오늘을 일군 것이라고 생각하니 야릇한 감회가 솟구쳐 올라왔다. 한국의 오늘을 사는 그 누구도 호암의 그늘에서 그리 멀리 벗어날 수 없지 않은가 말이다.


일제말 또 한 차례 낙향

호암은 훗날 대구에서 사업에 한창 성공가도를 달리던 30대 초반에 양조장과 상회일을 지배인에게 맡기고 이곳 중교리로 다시 낙향해 해방 때 까지 3년여를 지낸다. 태평양 전쟁 말기의 험악함을 피해 스스로 사업을 '소개(疎開)'하고 고향에 들어앉아 안거의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문득 그가 강조한 '운(運)', '둔(鈍)', '근(根)'의 세가지 성공의 요체를 떠올린다. 사업가로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운이 따라야 하고, 당장 운이 닿지 않으면 우직하게(鈍) 기다릴 줄 알아야 하며, 용케 운이 닿아도 근기가 있어야 내것으로 만든다고 했다.

아직 운의 줄기를 보지 못한 낭인 시절 호암은 이곳 중교리에서 불면의 밤을 뒤척였고 사업을 시작한 후 질곡을 거쳐 성공했을 때는 시류가 수상하다 여겨 스스로 사업을 벗어던졌다.

그래서 중교리는 때로 방황하고 때로 기다리는 '둔(鈍)의 세월'을 의미한다. 호암은 사업에 투신하겠다는 첫번째 각성에 이어 정확하게 10년 후 해방을 이곳에서 맞으며 '사업보국'을 결의했다.

그 스스로 '두번째 각성'이라 주를 달았으니, 중교리는 비단 고향으로서만이 아니라 대사업가 이병철을 두번 태어나게 만든 인연의 땅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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