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묻지 마세요

머니투데이 김준형 기자 | 2004.08.24 13:06

-돈으로 본 세상-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굴지의 리딩뱅크에서 '역사 훼손' 소동이 벌어졌다.
얼마전 모 은행 연수원 세 곳에서 전직 행장들의 발자취가 담긴 기념물들이 일시에 사라진 것이다. 통합 되기 이전 두 은행 역대 행장들의 기념석 서명이 파내졌고, 연수원에 걸려 있던 초상화들도 일시에 모두 내려졌다. 식수 기념 비석은 땅속으로 묻혔다.

합병이전 소매금융 중심의 역사가 '구멍가게' 내지는 '전당포'같이 구차해서 대한민국 대표은행으로서의 진로와 걸맞지 않다는 생각에서였을까. 새로운 파워는 과거 권력에 대한 부정에서부터 나온다는 권력의 속성에 충실하기 때문이었을까. 그러잖아도 안팎 악재가 적지 않아 뒤숭숭하던 차에 이런 일이 생기자 직원들은 수군수군댔다. 노조가 의도적인 역사훼손이라고 반발하자 은행측이 원상복구에 나서 기념석은 땅위로 올라왔고, 역대 행장들은 다시 벽으로 올라갔다.
합병 이전 두 은행의 잔재들이 곳곳에 남아 있어 화학적 결합을 가로막는다는 의견이 있어 그랬다는게 은행 관계자들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내세우고 싶지 않은 과거'는 땅에 묻어 버리는게 최고라는 생각이 참 넓게 퍼져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과거'는 풀어야 할 숙제이자 귀중한 자산이다. 특히 잘못된 결과를 낳은 일을 낱낱이 분석하고 책임을 가리고 반성하는 '실패학'의 중요성은 이제 상식이 되고 있다.
일본 경제가 동면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도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일이다. 와다 카즈오 IMA사장은 한때 세계적으로 3만명에 가까운 종업원을 거느렸다가 파산했던 유통체인 야오한의 총수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실패한 전공 컨설팅회사를 설립, 일본 경제 부활과정에서 주목받고 있다.

1997년 노자와 쇼헤이 전 야마이치증권 사장이 올해 '센추 리증권' 신임 사장으로 증권가에 복귀할수 있었던 것도 파산선언 기자회견장에서 눈물로 종업원의 장래를 걱정했던 진지한 반성과 책임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미국 미시간주 앤아버의 아버 스트레티지 그룹(ASG)이 설립한 '뉴 프로덕트 워크스(NewProductWorks:NPW)'라는 박물관은 7만3000여 수집품가운데 코카콜라가 1980년대 중반 내놓았다가 참패한 '뉴코크'같은 실패작이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소장자료를 활용한 컨설팅비로 3000달러에서 수만달러를 받고 있으니 '과거(과오)=돈'이라는걸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기업 뿐 아니라 개인 투자도 마찬가지다. 개인 투자자 A씨는 외환위기 이전, 주식투자를 하면서 거래 지점에서 자신의 거래내역을 반드시 출력해 집으로 가져갔다. 기술적 분석에 따른 단기매매로 초기 거액을 날린뒤 자신의 매매가 정확하게 들어맞았던 사례,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한 사례를 몇번이고 복기하며 가슴속에 체화시켰다. 전산용지 박스가 방안을 가득 채울 정도가 되면서 한때 자산이 수백억원대로 늘기도 했다.

굳이 고수 투자자가 아니라 집안 살림만 하더라도 가계부를 쓰는 집과 안쓰는 집은 재산을 모을수 있는 잠재력에 차이가 날수 밖에 없다.

내친 김에, '잘못된 과거로부터 배우기'가 갖는 의미는 기업이나 개인뿐 아니라 나라경제에도 적용된다. 단순한 '실패'가 아닌,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역사적 과오까지 범위를 확대해도 달라질 건 없다.

"당장 먹고 살기 바쁜데 옛날 이야기는 왜 꺼내느냐"는 이야기는 해방 이후 쭉, 아니 할아버지때부터 반복돼온 이야기였다. 좋은 일도 있는데 왜 나쁜 걸 들춰서 조상과 나라를 온통 부끄럽게 만드려느냐"는 반발은 '대다수의 조상'을 '부끄러운 쪽'과 섞어 놓으려는 물타기이다. 정녕 조상과 역사앞에 부끄러운건, 자기 세대에 해야 할 일을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다. 괴테의 말처럼 과거를 잊는 자는 결국 과거 속에 살게 된다.

머니투데이는 '당당한 부자'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다. 안타까운건 '정당한 부'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게 쉽지 않다는 점이다. 과거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을때, 부에 대한 정당한 사회적 평가와 인식은 그만큼 힘들어진다. 경제발전의 필수 전제인 사회통합과 가치공유도 어려울수 밖에 없다. 과거를 땅에 그냥 묻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더구나 아직 그 과거의 그림자가 지금까지 드리워져 있는 마당에 '산 채로' 과거를 묻는다면 이는 두고 두고 '비용'으로 우리에게 청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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