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칼럼] 기업이 투자 안하는 이유

권성철 한국투신운용 사장 | 2004.07.05 09:58
수출은 잘 되는데 체감경기는 꽁꽁 얼어붙었다. 개인·정부·기업 할 것 없이 안 먹고 안 써서 생긴 병(病)이다.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개인소비는 당분간 기대할 것이 없다. 자산가치가 불어나든지 소득이 늘어나야 하는데 전자는 집값, 주가(株價)가 정체돼 있고 후자는 임금이 오르든지 고용이 늘어나야 한다. 하투(夏鬪)로 어수선한데 고용이 늘어날 조짐이 없다. 게다가 집 사느라, 차 사느라 빚더미 위에 앉은 꼴이니 더 이상 빚으로 소비를 늘리기는 틀렸다.
 
개인이 경기를 이끌기에 역부족이라면 기업의 형편은 어떤가. 투자가 기업으로 치면 소비다. 사실 기업은 전례 없이 엄청난 돈을 쌓아두고 있다.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삼성그룹이 지난해말 보유한 현금은 9조원으로 한 해 동안 58% 늘어났다. 이런 사정은 LG, 동원, 한진, 코오롱 등 매한가지다.

늘 자금 부족으로 허덕이던 우리 기업에 현금이 넘치는 이유는 한마디로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대기업 총수들이 대통령을 만나 수십 조원 규모의 투자를 약속했지만 속마음은 편치 않을 것이다.
 
투자를 가로막는 두 가지 장애물이 있다. 첫째, 위험을 피하거나 줄일 길이 없어졌다. 위험을 측량하고 감당할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기업활동의 핵심인데 반해 우리 기업인들은 과거 40년 위험을 회피하는 '관행'에 익숙해져 있었다. 정치인·관리들과 친했고 때때로 돈도 건넸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서 이런 울타리가 없어진 것이다. 더욱이 시민단체들이나 투자자들의 눈이 무서워 새 사업에서 발생할지 모르는 적자를 다른 계열사에 떠넘기기도 어려워졌다. 내다 팔 품목이 떠오르지 않는 현실에서 이는 보통 문제가 아니다.
 

둘째, 전체 상장기업에 대한 외국인지분이 40%를 넘어섰고 일부 대기업의 경우 60%를 육박하는 상황에서 그룹 오너들은 누가 경영권을 넘보지나 않을까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경영권 방어를 위해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상황이 언제 생길지 모른다. 지난번 '소버린 대(對) SK'가 좋은 예다.

과거 지배구조가 나쁘면 매수를 꺼리던 대형 뮤추얼펀드조차 지금은 그런 기업을 골라 의결권행사 등을 통해 중요한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주가를 올린 후 투자가치를 실현하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여하튼 기업은 잔뜩 움츠려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역할은 무엇인가.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지만 경기가 살아나야 근본적으로 해결될 성질의 문제이어서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또 미국처럼 금리를 낮추면 도움이 되겠지만 부작용 -부동산거품 - 을 우려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정부의 씀씀이를 늘릴 수도 있다. 물론 정부가 예산을 현명하게 쓰고 민간은 세금을 더 낼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 정부가 빚을 낼 수도 있지만 나중에 (후손이) 갚아야 한다. 차라리 세금을 깎아주는 것 - 올해 미국경기 회복의 원동력이다 -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요즘 논란이 한창인 '신행정수도 이전'에서 엊그제 발표된 '저소득층 아동보육료 지원'까지 온갖 과제들을 집행하자면 세금을 깎기는커녕 늘려야 할 판이다.
 
결국 남는 것은 마지막 수단 즉 기업으로 하여금 투자를 하게 하는 길이다. 미국에서도 개인소비라는 불쏘시개로 간신히 살아난 경기가 올 하반기부터 기업의 투자확대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앞서 지적한 기업인들의 의구심 내지 불안을 가라앉혀줄 비법은 무엇일까.

규제완화라는 재료는 더 이상 약효가 없어 보인다. 동반자로서 새로운 차원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은 비단 한-미 정부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정부-기업간에도 절실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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