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경영]세종대왕 경영학

한근태 한스컨설팅 대표 | 2003.09.24 12:19
세종대왕 하면 한글창제가 연상된다. 하지만 한글을 만든 것 때문에 세종의 다른 업적이 희석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는 한글창제보다는 CEO로서 탁월성을 보인 분이다. 한글창제 외에 경제, 문화, 사회, 의료, 과학 분야에서 혁혁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요즘같이 혼탁한 리더십 부재의 시대에 세종의 리더십을 재조명함으로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보길 권한다.
 
첫째, 그는 경제 살리기를 제 1의 국정과제로 선정했다. 창고에서 인심이 나는 법이고, 윤리와 도덕도 일단 배고픔을 면한 후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농사법 혁신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그 결과물 중의 하나가 농사직설이란 농작물 재배지침서다.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는 때를 정확하게 알아라, 거름을 줌으로서 지력을 높여라, 하늘만 바라보지 말고 적극적으로 물을 끌어들여라, 밭이랑 사이에 다른 작물을 심어라." 대강 이런 내용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내용이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 책으로 인해 생산성이 300% 이상 올라갔으니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다.
 
둘째, 그는 R&D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세종은 기술개발 없이 경제성장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농업혁명도 그렇고 지식혁명도 기술개발의 뒷받침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판단으로 모든 역량을 이곳에 집중했다.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 등의 개발은 모두 농업혁명을 위해 만들어 진 것이다.

또 지식 보급을 위해 고려의 금속활자를 개량하여 경자자와 갑인자를 개발했는데 이로 인해 인쇄의 생산성이 20배 증가했고 선명도도 크게 높아졌다. 정말 생산성 대상을 받을만한 일이다. 한글개발, 인쇄기술 개발, 제지 기술의 발전 이 모든 것이 지식 혁명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그것이 결국 경제활성화를 이룬 것이다.

활자개발 과정에서 나온 노하우는 금속공업 발전에도 기여를 했다. 하나의 기술이 다른 기술 개발을 자극했고 그런 것들이 모여 경제성장의 밑받침이 되었던 것이다. 기술개발을 외면하고 공대에 학생이 지원을 안 하는 나라에서 무슨 수로 GNP 2만 불을 달성하겠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셋째, 세종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CIO였다. 그의 정보 수집 및 관리에 대한 신념은 오늘날 인터넷의 특징인 새로움, 개방성, 유효성과 상통한다. 그는 정보에 민감했으며 정보를 국가 경영의 주요수단으로 활용했다. 당시 과학문명의 선진국인 중국과 이슬람으로부터 배우기 위해 출장자들에게 신간구입을 해 올 것을 늘 주문했다.


그래서 숙소도 유리창이라는 백화점식 서점 근처에 얻게 했다. 새로 나온 책은 꼭 두 질씩 구입하게 했고 수집된 책은 인쇄소에서 복사판을 찍어 배포하기도 했는데 당시 집현전 도서관으로는 더 이상 보관이 불가능하자 장서각이란 도서관을 새로 건립했다.
 
세종의 또 다른 업적은 조선실록을 세 부 더 복사해 전주, 충주, 성주 사고에 보관케 했던 것이다. 지금으로 하면 비상시 백업플랜을 만들어 두었던 셈이다. 이로 인해 임진왜란 당시 세 곳 사고의 실록이 모두 없어졌지만 전주사고가 남아 우리가 지금도 조선실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넷째, 무엇보다 세종의 위대함은 좋은 인재를 많이 발굴하여 폭넓게 사용했다는데 있다. 경제를 살리는 것도 연구를 하는 것도 의학기술을 개발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란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는 다양한 경로와 전략을 통해 인재를 대거 영입했다.

그의 인사철학이다. "덕은 외롭지 않아 반드시 이웃이 있다. (德不孤 必有隣) 조선에 인재가 없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나타나려 하지 않음이 문제이다. 인재가 없음을 탓하지 말고, 그들이 나와 같이 일하려 하지 않음을 탓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세종 시대 최고의 연구소장인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나라에서 귀화한 사람이고, 어머니는 부산 동래의 기녀였다. 당시로는 도저히 중용할 수 없는 사람이었던 셈이다. 그는 신하들의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종6품인 상의원별좌에 임명하였는데 이 직책은 고을의 현감과 같은 직급이었다.

이런 파격인사는 신분제도 하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치지 못해 절망하던 인재들에게 숨통을 터주고 조선을 다이내믹한 사회로 만드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코드가 맞는 사람하고만 일을 하겠다는 현 정부의 인사정책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무엇보다 세종은 본인이 알아야 경영을 할 수 있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새벽 5시부터 시작되는 경연에 거의 빠진 적이 없을 정도로 학문을 닦는데 열성을 기울였다. 경연이란 강의를 듣고 신하들과 토론을 하는 자리인데 하루에 다섯 번을 했다고 하니 그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국가의 프로젝트, 이슈에 대해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입하고 헌신을 한 결과 최고의 CEO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종의 코드를 읽어라 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 발췌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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