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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최후의 승자는 조조가 아닌 사마의(중달)다. 그는 천하의 제갈공명과 자웅을 겨루는 전략가였으면서도 위나라 조조 가문에 납작 엎드려 기회를 보다 나이 70세에 실권을 장악해 진(晉)나라 건국의 초석을 다졌다. 그는 라이벌 조상을 속이기 위해 치매 환자 연기까지 했다. 의약술 등 제반 환경으로 볼 때 당시 70세는 지금의 90세나 다름없다.
고려 공민왕 때 19세 나이로 성균시에 합격했던 정도전이 정치적 영향력이 막 생긴 30대 중반에 실권자 이인임의 탄압으로 유배와 유랑을 하던 중 호구지책을 위해 남경(지금의 서울) 삼각산 아래에 삼봉재(三峯齋)라는 학당을 열었으나 그마저 견제를 받아 부평, 김포로 떠돌아야 했다.
1383년(고려 우왕 9) 개나리 봇짐에 원대한 조선 건국(朝鮮 建國)의 포부를 담아 머나먼 함주(함경도 함흥)의 이성계를 제 발로 찾아갔을 때 나이 42세, 당시로는 이미 정승판서 급으로 긴 수염 날리며 가마 타고 호령할 장년이었다.
전기나 평전이 아닌 『정도전』은 ‘500년 왕조 조선의 설계자로서 책임정치의 씨앗을 뿌린’ 정도전의 사상을 엿보거나 직관할 수 있도록 그의 핵심 저작인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경제문감별집』의 주요 내용을 현시대 독자가 읽기 쉽도록 간추려 정리했고, 마지막에 정도전이 쓴 상소문이나 산문 중 의미가 있는 것들을 골라 실었다.
성리학을 사상적 뿌리로 삼았던 정도전은 3040시기 유배, 유랑 때 ‘민(民)의 발견’을 경험하면서 민본, 위민 정치의 원칙주의자가 돼 어떻게 하면 고려 왕조의 전철을 밟지 않으면서 이를 실현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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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국전』 첫머리를 ‘물은 배를 띄우기도, 뒤집기도 한다’는 역성혁명의 내용으로 시작했던 ‘혁명가 정도전’은 이성계를 정치에 끌어들이고 그의 이론가로서 조선 건국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그가 취중에 했다는 것을 “한 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 고조를 쓴 것이다”라는 말로서 암시했다.
정도전이 설계했던 민본, 위민의 신권국가는 왕권국가를 그렸던 이방원(태종)과 충돌한 후 허무하게 스러졌지만 이후 언관의 활동 보장과 기록의 국가 조선, 두 차례의 반정(反正)으로 국왕에게 정치의 책임을 물었던 500년 조선을 넘어 어쩌면 지금의 대한민국에까지 정도전의 사상과 꿈이 밑바탕에 흐르고 있을 것이다.
▲▲『정도전』 / 이익주 편 /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