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졌잘싸'보다 '잘싸졌'

머니투데이 김주동 국제부장 2024.10.28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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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이 11월9일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승복 연설을 하는 장면. /사진=NBC 유튜브 화면 갈무리2016년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이 11월9일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승복 연설을 하는 장면. /사진=NBC 유튜브 화면 갈무리


"그가 모든 미국인을 위한 성공적인 대통령이 되기를 바랍니다."

2016년 11월9일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이 공개석에서 승복 연설을 했다. 대부분 여론조사가 그의 당선을 전망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에게 충격 패배를 당한 다음 날이었다.

클린턴은 전날 밤(투표일) 트럼프에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며 당선인에게 "나라를 위해 함께 일하겠다"고 말했다고 했다. 패배가 고통스럽다면서도 그는 선거 운동이 특정인을 위한 게 아닌 국가의 발전적인 모습을 위한 것이었다고 지지자들에게 통합을 촉구했다.



"우리는 나라가 생각보다 깊이 분열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중략) 도널드 트럼프는 우리의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에게 열린 마음으로 나라를 이끌 기회를 줘야 합니다. 우리의 입헌 민주주의는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소중히 여깁니다."

같은 날 트럼프는 당선 연설에서 이에 화답했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 봉사해온 힐러리에게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중략) 이제 미국은 분열의 상처 부위에 붕대를 감고 단결해야 할 때입니다. (중략) 모든 미국인을 위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맹세합니다."



예상 밖의 트럼프 당선에 불안감 커진 당시 아시아 증시는 급락했다. 하지만 다음 날 '통합'을 외친 연설을 듣고 낙폭을 모두 회복했다.

감동이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4년 전 미국에선 이런 그림을 볼 수 없었다. 트럼프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 결과는 2021년 1월 의회 폭동으로 이어졌다. 이런 정치적 불안정은 현대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라는 미국의 위상이 떨어지는 데 영향을 줬다.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 모방심을 자극하는 악영향도 줬다. 2023년 1월 브라질에서는 똑같은 이유로 의회 등에 난입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2022년 12월에는 독일에서 의회를 습격하려던 쿠데타 세력 27명이 체포된 일이 있었다.

트럼프에 의해 끊기기 124년 전인 1896년, 낙선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당선자 윌리엄 매킨리(25대 대통령)에게 축하 전보를 보낸 이후 미국에서 대선 패자의 공개적인 승복은 계속돼왔다.


호주 애들레이드 정치학 교수인 폴 코코란은 1994년 학술지 '폴리티컬 커뮤니케이션'에 미국 대선 패자의 연설 40년치를 연구해 쓴 '대통령 승복 연설: 패배의 수사학'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에서 교수는 패자의 승복 연설이 "민주적인 생활 및 권력의 정당성 부여에 필수적인 것"이 됐다면서, 연설의 궁극적 결과물은 승복 자체가 아니라 지지자들이 패배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있다고 짚었다.

리더가 자신의 지지자들을 보듬고 통합을 외치는 게, 결국 민주주의를 지키고 우리 사회가 정상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특히 코코란 교수는 득표율 차이가 작은 치열한 선거일 경우 통합을 강조하는 연설들이 많이 나왔다고 했다.



2016년과 2020년 미국 대선 직후 패자의 모습은 상반됐다. 그리고 이후 펼쳐진 모습은 이들의 행동이 어떤 큰 파장을 만들 수 있는지 충분히 보여줬다. 특히 논문 사례들을 보면 2020년 대선은 초박빙 승부로 패자의 승복이 더 필요했지만 없었다.

올해 선거도 여론조사 결과가 맞다면 초박빙 대결일 것이고, 이는 또다시 분열의 행동을 자극할 수 있다. 선거 후 대규모 폭력을 경험한 미국은 올해는 선거 운동 기간에 후보자를 향한 총격 사건까지 겪었다. 여론조사 업체 유고브의 10월 18~21일 조사에서 미국 유권자 27%는 '대선 뒤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매우, 어느정도 응답 포함)고 했다. 비슷한 시기 스크립트뉴스/입소스의 조사에서는 미국 성인 62%가 '선거 뒤 폭력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금은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보다 "잘싸졌"(잘 싸웠지만, 내가 졌다)이 절실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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