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주'는 짐작했을까. 한 살에 경매돼 고작 2년을 내달린, 자신의 결승선이 똥더미 위일 거란 걸. 다릴 다쳐 주저앉고, 일어나려 애쓰다 벽에 부딪혀 이마에 피를 철철 흘리고. 밤새 몸부림치다 이윽고 차게 굳을 거란 걸.
그리고 '질주'는 해당 불법 말 농장에서 죽은(눈으로 확인된 걸로만), 아홉 번째 말이었다.
"말 사체들이 굴러다녀"…퇴역마 8마리가 죽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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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가 퍼붓던 날 아침. 도착한 공주 불법 말 농장에 들어설 때, 김정현 한국말복지연구소 소장이 말했다. 말 이력을 확인할 리더기를 손에 쥔 채였다. 동행한 김성호 한국성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와, 김정현 소장의 친한 동생 서경씨(가명)와 차에서 함께 내렸다.
대부분 삐쩍 마른 말들이 바닥에 코를 박듯, 건초를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 갈비뼈가 선명하게 다 드러난 말들도 있었다. '퇴역마'일 거라고 했다. 한때는 경마장에서 달렸거나, 승마장에서 사람이 탔거나. 그러다가 나이가 들고 여러 이유로 쓸모없어졌다며, 종착지 가까이 흘러왔을 말들.
"23마리 말 중에서 8마리는 사체였어요. 여기도 죽은 말이었고, 말 뼈들이 아직도 있고요. 마주(말 주인)가 있는데, 그런지 몇 년 됐다고 하더라고요. 남은 말 15마리도 갈비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어요. 끔찍했죠. 너무 배고프니까 똥까지 먹더라고요. 저희 오고 며칠간 매일 와서 밥을 줬거든요. 저것 보세요. 애들이 하루 종일 먹어요."
멀쩡히 살아 있는 말이 '폐사'라고…이력 관리 엉망말들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김정현 소장이 분주히 움직였다. 치워지지 않은 말똥밭 속으로 발을 푹푹 집어넣었다. 여전히 굶주린 말들에게 건초를 주고, 허겁지겁 먹는 사이 목 부분에 리더기를 대었다. '삑' 하고 내장된 마이크로칩을 확인하는 소리가 났다.
"21살, 설탕이(가명)고요. 얘는 경주마인 것 같아요. 너 왜 여기 와 있는 거야, 처음엔 예쁨 받고 비싸게 왔을텐데…."
"경주마는 이력제가 다 돼 있고, 마이크로칩이 내장돼 있어요. 근데 이렇게 관리가 안 돼요. 말이 쓸모없어지면 돌고 돌잖아요. 레저용으로 갔다가, 마차 끌다가, 농장 갔다가, 결국엔 도축되기도 하고요. 이력제 확실하게 하고, 추적.감시만 잘해도 달라질 거예요."
우아하고 도도하던 말이 1년 만에…충혈된 눈이 애달팠다
"어차피 (퇴역마들) 처리하려면 돈 드니까요. 이런 말들을 거의 공짜로 가져오다시피 해서 도축해서 또 벌고. 운 좋아서 상태가 괜찮으면 200~500만원에 팔고요. (살아 있는 말들은) 지역 축제를 뛰면 말 한 마리에 얼마씩 받는대요. 화물차 같은 거에 말 싣고 와서, 똑바로 서 있지 못 하면 죽여야 하니까. (도살할 때) 말이 막 발버둥 치는 소리도 들었고요."
실제 마주가 쓴 글을 찾다가, 이리 적어 올린 걸 봤다. 승마장에서 안 쓰는 말을 처리해주겠다고.
"아마 마주들도, 내가 말들을 실제 보낸 곳이 이런 몰골로 굶겨 죽이는 줄은 모를 거예요. 처리 방법은 없고 어려우니까. 대부분 힘든 광경을 마주하기 힘들어하고 피하잖아요. 잘해주겠지, 난 모르겠다, 그런 거지요."
어쩌면 말산업이 가장 외면하고 싶은 '하수구' 같은 역할을 자처해온 곳. 이처럼 보내졌을 때 퇴역마의 전후가 어떤지 알려줄 말이 여기 공주 불법 말 농장에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마주한 환희에게서, 그런 모습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왼쪽 눈은 잔뜩 충혈돼 있었고, 무기력한 표정으로 고갤 떨구고 있었다. 자기가 처하게 된 상황을 정확히 안다는 듯. 그게 애달팠다.
8마리 폐사에, 2마리 또 죽었는데도…공주시청 동물보호팀장 "동물학대 아냐"
"학대라고 하면은, 학대 증거가 있어야 하잖아요. 말들이 야위고 폐사가 됐다고 해서 동물보호단체에서 학대라고 주장하시는데요. 말들이 어떤 상태로 농장에 왔는지 저희가 확인이 안 된 상태에서 학대다, 아니다, 단정 짓기는 어렵더라고요."
"양평 때는, 경찰 동원해 폴리스 라인 쳐서 접근 금지하고, 검역관들 와서 수거했는데요. 공주시는 그동안 봐 온 지자체 중에서도 특히 방어하는 보입니다. 이게 지자체 책임이란 걸 인지를 못 하는 것 같고요. 동물학대로 지자체에서 인정하면 지원할 수 있는 게 많습니다."
매년 대책 없이 쏟아지는 1000마리 넘는 퇴역마…"말 과잉 생산이 근본 문제"
정진아 동물자유연대 사회변화 팀장의 말이 그랬다. 그 시스템, 법과 제도를 만들어야 할 주체. 그 중심에 한국마사회와 농림축산식품부가 있다.
퇴역마가 끊임없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는 뭘까. 김정현 소장이 이를 선명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리 짧게 경마장에서 뛰고. 그 결과, 1년에 경주마 1500마리 정도가 '경주 부적합' 판정을 받고 쏟아진단다. 소수는 '휴양 목장' 같은 곳에서 여생을 잘 살지만,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퇴역마들이 승용마로 넘어가기도 하고(전체 약 31%, 2021년 기준), 꽃마차도 끌고, 그러다 헐값에 팔리고 도축되기도 한단다.
경마장 /사진=류승희 기자 grsh15@
"생산이 과잉되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말들이 나오는 게 문제에요. 이 말들에게 두 번째, 세 번째 기회를 줄 시간과 돈을 들이기엔 말들이 너무 많은 거죠. 갈 곳이 없어요. 경주마들 가격이 싸니까, 승용마로 흘러오는 거예요. 도축되거나 열악한 승마장에 팔려 가면 값싼 소모품 취급을 당하고요. 이런 산업 구조를 만든 게 마사회니까, 어느 정도 도의적, 경제적,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거죠."
한국마사회 '유명무실' 대책 비판…"승마장 내 말 생추어리 만들어 지원해야"
정기환 한국마사회 회장이 2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에서 열린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한국농어촌공사·한국마사회 등 국정감사에 출석해 의원 질의에 답하고 있다. /사진=뉴스1
관련 법 마련도 난항이다. 조현정 카라 정책기획팀장은 "21대 국회에서 비참한 퇴역마 복지를 위한 동물보호법 개정안이 발의됐으나,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며 "당시 말 산업계는 개인의 사유재산 처분 권한을 제약한다며 반대했고, 농림축산식품부는 소극적 자세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김정현 소장이 조사한, 퇴역 경주마 복지 시스템의 해외 사례가 이랬다.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말 생추어리(보호시설)의 모습이 이랬다.
익숙한 사람과 익숙한 장소에서 오래도록 함께 사는 것. 그리 함께하다 하늘나라에 갔을 때 장례를 치르게 해주는 것. 경주마든 승용마든 신나게 내달리다 맞는 결승선이, 적어도 그런 따뜻한 방향이었으면 싶었다.
말의 '공감 능력'에 대한 얘길 들었다. 포유류 중에서도 사람만큼 발달한 게 말이란다. 상대방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잘 아는 것 같다고. 서경씨가 들려준 얘기가 이랬다.
"제가 코치했을 때였는데요. 말 주인 분이 차를 주차하면, 그 소릴 듣고 말이 마중을 나오는 거예요. 또 레슨하던 친구들 중에 소심한 애가 있었어요. 승마하다가 정말 쾌활해졌거든요. 잘 놀다가 한 번은 놀라서 아이를 떨어트린 거예요. 근데 그 말이, 애가 떨어진 걸 알고 멈추더니 그쪽으로 가더라고요. 코로 이렇게 건드려요. 괜찮아? 일어나. 이렇게."
김정현 소장이 들려준 말 이야기는 더 뭉클했다.
"포르투갈에서 한국에 온 어떤 말이 있었대요. 그 말을 예뻐하는 마주가 있었는데, 어느 날 포르투갈 사람이 그 승마장에 온 거죠. 말도 포르투갈에서 왔는데 신기하다면서, 말에게 포르투갈어를 한 번 해보라고 그랬대요. 근데 말이 그걸 듣더니, 굉장히 감정적으로 동요하며 동향 사람 왔다고 극적으로 반응하더라는 거예요. 그걸 보고 다들 눈물이 났다고 했어요."
패럴림픽 선수가 얼굴 솔질해줄 때만 고개를 내린다던 말. 정말 똑똑한 동물이라 애정이 담긴 터치도 다 알아챈다는 말. 애정 표현으로 서로 입술과 이빨로 살살 긁어준단 말을 듣고 바라본 이들의 모습이 정말 그랬다.
건초 먹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게 다가와 준 나이 든 말을 보고, 그들의 표현대로 목을 톡톡 쳐주었을 때. 사람의 체온보다 1도쯤 높다는 그 몸이 참 따뜻했다. 오래도록 안고 싶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