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다른 나라에 팔러 중국 왔다" 세계 최대 캔톤페어 가보니

머니투데이 광저우(중국)=우경희 특파원 2024.10.2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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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저우서 개막 가을 캔톤페어, 제3세계 바이어 인산인해…
미국 등 서방국가는 빠져나가 "백인 많은데 영어 안 들려",
일대일로·글로벌사우스 국가 주도하려는 중국 무역 야심

광저우 캔톤페어 12관 인근 통로를 위에서 내려다 본 장면. 시간이 지날수록 관람객 수는 더 늘어났다./사진=우경희 기자광저우 캔톤페어 12관 인근 통로를 위에서 내려다 본 장면. 시간이 지날수록 관람객 수는 더 늘어났다./사진=우경희 기자


"우리 제품은 중국엔 전혀 판매하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캔톤페어(Canton Fair·수출입상품교역회)엔 8년째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선 보기 어려운 바이어들을 많이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23일 중국 광저우(광주) 가을 캔톤페어 현장에서 만난 한국 기업 플라텍 박찬문 부사장의 설명이다. 박 부사장의 말은 한중관계 냉각 속에서도 우리 기업들이 캔톤페어를 외면하기 어려운 이유, 또 중국 정부가 구축하고자 하는 중국 주도의 새로운 국제무역 생태계 상을 잘 보여준다.



한국은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를 보는 데 익숙하다. 그런 한국의 눈엔 잘 보이지 않지만, 세계의 절반은 미국이 아니거나 미국과 특별히 친하지 않은 나라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코로나19 이후 미중관계는 빠르게 악화했다. 코로나를 딛고 규모를 회복한 캔톤페어 현장은 그런 국제질서 변화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었다. 한 한국 기업인은 "미국이 아닌 세계의 다른 절반이 광저우에 와 있다"고 했다.

"해외 바이어 이렇게 많은데, 생각보다 영어가 안 들리네?"
KOTRA가 지원한 캔톤페어 한국관 한국기업 부스에 외국인 바이어들이 구입문의하고 있다./사진=우경희 기자KOTRA가 지원한 캔톤페어 한국관 한국기업 부스에 외국인 바이어들이 구입문의하고 있다./사진=우경희 기자
매회 20만명 이상의 바이어가 몰리는 광저우 캔톤페어는 세계 최대 무역 박람회다. 봄, 가을 두 차례 각각 1~3기로 나눠 진행되는데 매회 인산인해다. 코로나19로 부침을 겪었으나 올 봄 행사를 거치며 정상화했다는 평을 받았다. 이번 가을 행사는 오히려 코로나19 이전보다 규모가 더 커졌다는 게 중론이다. 미국 등 서방국가들이 빠르게 빠져나갔지만, 빈자리는 제3세계와 개도국 국가들이 꽉 메웠다.



박 부사장의 플라텍은 국내선 이미 PP(폴리프로필렌) 재질 빗자루 시장 80%를 점유한 우량 기업이다. PP연신 특화기술로 만든 빗자루에 갈퀴로 긁는다는 뜻인 '하르켄' 브랜드를 붙여 유럽에도 판다. 캔톤페어에 들이는 공은 비상하다. 박 부사장은 "올해로 8년째 캔톤페어에 온다"며 "코로나19 공포로 완전히 발길을 끊었던 유럽 바이어들이 올해 확실히 돌아오고 있다"고 했다.

친환경 건자재를 선보인 우주웰보드 이장희 이사 역시 "코로나19 이전보다 훨씬 인원이 많고 행사 규모가 크다"며 "중동과 인도 등에서, 러시아 바이어들도 많이 온 것으로 보이며, 이들이 미국 등 바이어들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기업들의 전시 참여를 지원한 KOTRA(코트라) 이재은 전략전시팀 과장도 "23일은 캔톤페어 2기 첫날임에도 바이어의 수가 눈에 띄게 많다"고 했다.

한 중국 인조잔디 제조사 부스에 외국인 바이어들이 몰려들어 계약상담하고 있다. 대부분 중동과 북아프리카 국가 바이어들이다./사진=우경희 기자한 중국 인조잔디 제조사 부스에 외국인 바이어들이 몰려들어 계약상담하고 있다. 대부분 중동과 북아프리카 국가 바이어들이다./사진=우경희 기자
캔톤페어 현장을 채운 바이어들은 한국 기업의 눈으로 보면 생소한 국가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북유럽과 동유럽, 중동, 남미 국가들이 주를 이룬 가운데 아프리카 출신 바이어들도 적잖았다. 거의 모두 비영어권 국가들이다. 백인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영어는 거의 들리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모두 중국이 주도하는 일대일로나 글로벌 사우스(미국 영향력 밖의 개도국 및 후진국) 국가들이었다.


사업 하는 입장에선 메리트다. 한국이나 미국에선 만나기 쉽지 않은 나라의 바이어들을 만날 수 있어서다. 한국기업 워터랩의 특허 아로마 샤워꼭지를 유심히 살피던 한 외국인 바이어에게 국적을 묻자 "벨기에에서 왔다"고 답했다. 건자재 유통사업을 한다는 티자니(Tijani) 씨는 "한국 기업들에 대한 정보가 많지는 않지만 소개받고 나면 기술력 면에서 인상적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중국엔 안 팔아도...' 새 글로벌 플랫폼 꿈꾸는 중국
13.2관에 부스를 차린 수없이 많은 기업들의 명단 앞을 중국인들이 지나고 있다. 13.2관은 13관의 2층 공간을 말한다./사진=우경희 기자13.2관에 부스를 차린 수없이 많은 기업들의 명단 앞을 중국인들이 지나고 있다. 13.2관은 13관의 2층 공간을 말한다./사진=우경희 기자
캔톤페어에서 만난 한국기업들의 공통점은 제품을 중국에 판매하려고 들고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절수형 자동 물내림 비데와 커피머신 등을 전시한 한국 기업 에이스라이프(트레비) 이경태 해외영업과장은 "가장 큰 타깃은 유럽, 일본 등 아시아 국가, 북미 등"이라며 "캔톤페어에선 회사가 원하는 거의 모든 시장의 바이어들을 만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다양한 수출 경로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기업들의 반응은 거대한 캔톤페어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이를 통해 캔톤페어를 통해 중국 정부가 구축하려는 무역질서의 상은 확연히 알 수 있다. 바로 중국을 통한 글로벌 기업들과 제3세계, 이른바 일대일로 참여국이나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의 연결이다.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지 않은 국가들의 무역 확대를 지원하는 플랫폼을 중국이 해낼 수 있다는 거다.

실제로 미중관계 악화 속에서 서방국가의 캔톤페어 참여는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한국 기업들의 참여율만 봐도 알 수 있다. 지난 2019년 114개사가 참여했던 KORTA 한국관엔 올 봄 31개사가 참여하는 데 그쳤다. 가을 참여사 숫자도 비슷하다. 그럼에도 전체 행사 규모는 코로나19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커졌다. 현장에선 "세계엔 미국만 있는 게 아니다"라는 중국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행사장에 입장하기 위해 바이어 배지를 받는 장소. 이미 인산인해다./사진=우경희 기자행사장에 입장하기 위해 바이어 배지를 받는 장소. 이미 인산인해다./사진=우경희 기자
한편 캔톤페어는 지난 1957년 최초로 시작됐다. 올 10월 행사가 136회다. 전시장 규모만 축구장 220개에 달하는 155만㎡다. 전시장 간 거리가 멀어 내부에 셔틀 역할을 하는 코끼리열차가 쉴 새 없이 운행되며, 이 열차를 타기 위해서도 상당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봄 가을 행사는 각각 가전·전자 등이 주력인 1기, 가정용품이나 건자재가 주인공인 2기, 의류와 방직류가 중심인 3기로 나눠 운영된다.



행사 이름인 캔톤은 광저우를 광둥어로 발음한 것을 개항 당시 중국으로 왔던 영어권 서양인들이 캔톤으로 발음한 데서 유래된 광저우의 애칭이다. 베이징을 광둥어로 발음한 페킹(PEKING)이 일부 영어권 국가에서 아직도 사용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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