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혁신 앞섰던 독일, 경제는 왜 미국에 뒤처졌을까?

머니투데이 루카스 베드나르스키 S&P글로벌 수석 애널리스트 2024.10.26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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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Tech Powers]'배터리 전쟁' 저자 루카스 베드나르스키 고정 칼럼
<14>좋은 이론만큼 실용적인 것은 없다-기술 경쟁과 성장 모델에 대한 단상

기술 혁신 앞섰던 독일, 경제는 왜 미국에 뒤처졌을까?


이 칼럼은 주로 첨단 기술의 다양한 측면을 지정학적 관점에서 다룰 것이다. 최근의 정치적 사건들, 기술 혁명에 참여하는 기업들의 사례, 주요 경제·군사 강국 간의 경쟁과 연관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지난 한 해 동안 반도체부터 로봇공학까지 다양한 첨단 산업을 자세히 살펴봤지만, 때로는 나무 보다 숲을 보고 더 넓은 시각을 갖는 게 중요하다. 많은 학자들이 '좋은 이론만큼 실용적인 것은 없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이번 글에서는 기술 경쟁에 대해 과학이 말하는 바를 살펴보고자 한다. 가장 영향력 있지만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론들을 살펴봄으로써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미중 기술 경쟁의 현황과 방향, 그 안에서 한국의 위치에 대해 더 통찰력 있게 관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핵심 기술 장악한 소수 국가가 독점적 지위 누릴까?
이 주제는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고려할 때 매우 적절한 주제이기도 하다. 수상자인 제임스 A. 로빈슨과 다론 아제모을루는 2023년 출간된 영향력 있는 저서 '권력과 진보: 기술과 번영을 둘러싼 천년의 투쟁'에서 경제와 기술 발전 간의 관계를 탐구했다. 이 책의 연구 결과는 이 정도 수준의 저서 답게 결코 뻔하지 않으며, 매우 세밀하다.



첫 번째 결론은 많은 기술 전문가와 실리콘밸리 사람들의 바람과 달리 기술 발전이 본질적으로 좋은 건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것은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고 누가 통제하는가에 달려 있다. 기술은 경제 성장과 번영을 이끌기도 하지만 불평등을 심화하고 소수의 손에 권력을 집중시킬 수 있다. 기술 발전의 혜택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공평하고 유익한 방식으로 관리하고 배치하는 것은 제도의 권한 내에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유럽식 접근 방식에 더 가깝기 때문에 자유방임주의자인 일론 머스크의 팬들이 X(트위터)에서 자주 비판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로빈슨과 아제모을루의 책은 과거에 기술이 어떻게 엘리트층의 권력 구조를 강화하고 확장하는 데 사용됐는지, 그리고 기술 발전의 혜택이 전체 또는 대부분의 시민에게 돌아가는 과정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역사에서 많은 사례를 인용한다. 기술 낙관주의 시대에 흥미로우면서 신중한 관점이다.

기술 진보와 번영의 본질에 대한 아제모을루와 로빈슨의 고찰은 기술 경쟁이라는 우리의 핵심 관심사와도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 이 분야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이론 중 하나는 선도 부문 이론(Leading Sector theory)이다. 이 이론은 한 국가 또는 소수의 국가가 빠르게 성장하는 새로운 산업에서 핵심적인 기술 발전을 지배함으로써 이익과 높은 생산성 등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한다고 말한다. 과거 강대국들이 선도적인 분야에서 혁신을 독점하거나 거의 독점하는 방식으로 헤게모니의 지위를 확보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70년대 미국 국가안보 보좌관이었던 월트 로스토는 면직물, 철강, 화학, 자동차 등 역사적 선도 산업을 차례로 꼽았다. 그가 오늘날까지 살아 있었다면 배터리나 반도체를 이 목록에 포함시켰을까?



선도 부문 이론은 모든 비즈니스스쿨 졸업생이라면 익히 알고 있을 제품수명주기 이론(Product Cycle Theory)과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제품도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수명 주기가 있다. 제품 수명 주기의 첫 번째 단계에서 혁신 기업은 고유한 지적 재산을 보유하고 이를 기반으로 독점적인 수익을 창출한다. 앞서 말했듯이 국가에도 동일한 관찰을 적용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정상적인 이익은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곧 비슷한 제품이 시장에서 더 널리 생산되기 때문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이미 성장 단계에 있는 혁신 기업은 판매량 측면에서 경쟁에 직면한다. 이 격차는 제품 성숙 단계에서만 커지고 쇠퇴 단계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유지된다. 이러한 관점을 국제 관계 영역에 적용하면 두 가지 결론이 나온다.

먼저, 한국과 같은 혁신 국가들은 자국이 혁신한 기술로부터 높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지만, 이는 짧은 기간 동안만 지속된다. 이를 측정 가능한 용어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론은 그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 기간은 수십 년이 될 수도 있지만, 항상 지속될 거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 나라의 기업들이 계속해서 혁신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이 이론에 부합하는 한국의 주요 산업은 무엇일까? 나는 배터리와 반도체라고 주장하고 싶다. 두 번째 결론은 국가 간의 기술 경쟁과 더 관련이 있다. 이 결론에 따르면, 어떤 것도 기술의 확산을 늦추거나 막을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중국을 겨냥한 수출 통제와 같은 금지 조치는 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연구개발 앞선 독일, 왜 미국에 뒤처졌을까?

제프리 딩은 올해 저서 '기술과 강대국의 부상: 확산이 경제 경쟁을 형성하는 방법'에서 선도 부문 이론에 대한 대안으로 범용 기술(GPT)에 초점을 맞춘 설명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범용 기술은 이와 관련한 엔지니어링 기술의 저변을 결정적으로 넓히는 기술이다. 이 기술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a) 지속적인 개선 가능성이 크고, b) 다양한 목적으로 여러 분야에 적용될 수 있으며, c) 다른 기술과의 시너지 효과가 강하다는 점이다. 인공지능은 이 설명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범용 기술 이론의 더 흥미로운 측면 중 하나는 국가의 혁신성이 이 혁신을 더 널리 채택시키는 데 도움을 주지만, 그 반대는 반드시 성립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다시 국가 측면에서 이런 경우를 살펴보면, 한국은 배터리와 전기차 기술 분야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이지만 전기차 채택율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고, 해당 산업에서 성과가 훨씬 적은 국가에 비해 뒤처져 있다.

흥미롭게도 딩이 그의 연구에서 지적한 것처럼, 선도 부문 이론은 역사적 데이터와 잘 맞지 않는다. 특히 2차 산업혁명, 즉 1870년경부터 1914년의 기간 동안 독일과 미국의 부상하던 입지가 기존 초강대국이었던 영국과 어떻게 대비되는 지를 보면 알 수 있다. 학교에서는 1차 산업혁명만큼 2차 산업혁명에 대해 많이 가르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 세계는 바로 이 시기에 탄생했다. 주요 에너지원이 증기에서 전기로 대체됐고, 운송 분야에서는 석유를 연료로 하는 내연기관이 도입돼 빠르게 대중화됐다. 또 화학 분야가 합성 물질, 석유 정제 및 비료 생산으로 매우 중요 해졌다. 이로 인해 라이프스타일이 급격하게 변하면서 이동, 옷 입기, 식사, 집 꾸미기 등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혁신을 대부분 시작한 독일(실제로 현대 산업 연구소를 발명한 국가)이 1인당 GDP 성장률이나 생산성 증가로 측정할 때엔 경제적으로 가장 큰 혜택을 본 국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이 시대 R&D의 선두주자였던 독일은 기존 초강대국이었던 영국을 뛰어넘지 못했고, 미국은 1차 세계대전 이전 50년 동안 독일과 영국을 모두 빠르게 앞질렀다. 한편 이 시대에 화학 산업과 자동차 산업의 강국이자 전기의 얼리어답터가 된 건 독일이었다. 미국은 전쟁 전에는 이 측면들에서 모두 뒤처져 있었다.



그렇다면 미국의 경제적 성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기술과 무관한 것일까? 선도 부문 이론과 범용 기술 이론, 이 두 이론이 실제로 대립하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다. 선도 부문 이론이 사실이라면 당시 화학, 내연기관, 전기와 관련된 최첨단 기술을 발명하고 상용화한 독일이 영국과 미국을 경제적으로 앞질렀을 것이다.

한편 1차 세계대전 반세기 전 미국은 덜 화려한, 초기에 발명된 범용 기술이 퍼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범용 밀링 머신이나 터릿 선반 같은 기술 말이다. 그게 무엇이냐는 질문이 뒤따를 것이다. 범용 밀링 머신은 다양한 재료를 원하는 방식으로 절단해 모양을 만드는 기계고, 터릿 선반은 여러 개의 절삭 공구가 장착돼 공장 현장에서 빠른 공구의 교체로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한 기계다. 19세기 중반 발명된 이 두 가지 범용 기술의 보급은 한 과학자의 표현을 따르자면 '엄청난 비율'로 미국의 경제 성장에 기여했다. 실제로, 전세계가 미국식 제조 시스템을 더 나은 제조 방식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영국이나 독일 제조업체가 이러한 기술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것도 아니다. 다만 미국인들이 이러한 기술을 제조업의 모든 분야와 부문에 걸쳐 보편적으로 적용했다는 게 사실에 더 가깝다. 역사적 데이터에 따르면 미국의 사용 강도는 영국과 독일의 두 배에 달했다.



선도 부문 기술보다 범용 기술이 우위에 있는 사례는 최근 일본의 역사에도 적용할 수 있다. 80년대 일본의 경제 호황은 전자, 로봇, 자동차 산업과 같은 선도 부문에 더 집중됐고 범용 기술에는 덜 집중돼 있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소프트웨어 개발과 같은 범용 기술이 번성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컴퓨터화는 일본 경제의 많은 부문에 더디게 도입됐다. 80년대 말 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일본이 미국을 추월하고 언젠가 세계 초강대국이 될 거라 생각했다. 이에 관한 수많은 책과 기사가 쓰여 졌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범용 기술인 정보기술(IT)을 최대한 활용해 초강대국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한 곳은 미국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을 바꿀 차세대 범용 기술은 아마도 AI일 것이다. 한동안 중국이 이 분야에서 미국을 이길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수출 규제 정책, 다른 한편으로는 미드저니(Midjourney)나 오픈에이아이(OpenAI) 같은 미국 기업들의 성공으로 이제는 그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 반도체, 배터리, 자동차 분야에서 엄청난 경제적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범용 기술보다는 선도 부문 기술에서 더 많은 성장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딩의 연구 결과처럼 이러한 전략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AI 혁명이 한국에 큰 기회이기도 한 이유다. AI 관련 혁신이 해외에서 먼저 이루어졌는지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한국 산업계가 생산성 향상을 위해 전 부문에 걸쳐 AI를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적어도 범용 기술 이론은 그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좋은 이론보다 더 실용적인 것이 있을까?

*이 칼럼에서 표현된 견해와 의견은 전적으로 필자 개인의 것이며 소속회사의 것을 대변하지 않습니다. 필자와는 Twitter에서 @LithiumResearch를 팔로우하거나 [email protected]으로 연락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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