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렁한 시행령' 20년 방치한 국가, 배상 인정 땐 최초 사례…줄소송 전망

머니투데이 양윤우 기자 2024.10.2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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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리포트/대법원으로 간 '한뼘의 장벽']③

편집자주 누군가엔 한뼘에 불과한 문턱이 어떤 이에겐 매순간 극복해야 하는 장벽이다. 흉내만 낸 경사로에 쩔쩔매는 유아차와 노인, 휠체어를 보면서 우린 어느 만큼의 사회적 비용을 감내할 수 있을까. 대법원이 이 문제를 두고 3년만에 공개변론을 연다.

'헐렁한 시행령' 20년 방치한 국가, 배상 인정 땐 최초 사례…줄소송 전망


대법원이 교통약자의 이동권에 대한 국가배상 청구 소송에서 입법 부작위에 따른 배상 책임을 인정한다면 기존 판례를 깨는 최초의 판결이 된다. 국가의 입법 행위에 대한 중요한 기준이 세워질지 관심이 집중된다.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이 입법자(국회의원 등)의 부작위에 대한 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례는 아직까지 없다. 입법 부작위는 입법 기관이 법률을 제정하거나 개정해야 할 상황에서 이를 이행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법원에서 국가배상책임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국가의 행위가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위법한 행위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이론상 가능하지만 실무에서 이를 증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차진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번 대법원 공개변론에서 다루는 내용은 허술한 법 때문에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면서 정부에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라며 "시행령 개정 의무를 해태한 것에 대해 고의나 과실을 입증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데다 추상적인 법규범을 제때 개정하지 않은 것으로 구체적인 손해가 발생했다는 인과관계를 인정하기도 복잡하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어떤 법이 헌법에 맞지 않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왔다고 해서 그로 인해 발생한 모든 피해를 정부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법원 국가배상책임 인정 땐 '줄소송' 전망
(서울=뉴스1) 김도우 기자 = 조희대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18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전원합의체 판결 선고를 하기 위해 자리해 있다. 2024.7.18/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사진=(서울=뉴스1) 김도우 기자(서울=뉴스1) 김도우 기자 = 조희대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18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전원합의체 판결 선고를 하기 위해 자리해 있다. 2024.7.18/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사진=(서울=뉴스1) 김도우 기자
대법원이 이번 사건에서 원심판결을 뒤집고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는 취지의 판결을 내놓는다면 다음 쟁점은 국가가 배상해야 하는 금액이 어느 정도인지, 즉 과실 수준을 따지는 것이 된다.


다만 어느 만큼의 배상액이 적절하느냐는 논쟁과 별개로 국가의 입법 부작위에 대한 소송은 당장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차 교수는 "국회나 정부가 법률을 제때 개정해주지 않아 손해를 입었다는 소송이 급증할 것"이라며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하거나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개정 시한을 뒀는데 시한을 넘겨 무효가 된 규정이 많아 줄소송이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사례가 대표적이다. 헌재가 2019년 낙태죄 일부 조항이 헌법에 위배된다며 국회에 2020년 말까지 법률을 개정하라고 결정했지만 개정시한을 넘겨 4년이 돼가도록 국회가 새 법이 입법되지 않으면서 낙태죄가 사실상 폐지된 상태다. 이와 맞물려 여성의 안전한 임신 중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보건의료체계도 여전히 마련되지 않고 있다.



차 교수는 "수술보다 안전한 낙태약이 해외에서는 합법인데 국내에서는 국회가 후속 입법을 안 해줘서 불법"이라며 "검증되지 않은 약이 불법으로 유통되고 있는데 임신한 여성이 불법약을 먹고 불임 등 심각한 후유증을 앓으면서 국가에 배상을 청구하는 사례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국회사무처 법제실이 최근 발간한 '헌재 결정과 개정 대상 법률 현황'에 따르면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개정 시한이 지난 법률은 낙태죄를 포함해 총 8건으로 집계된다. 아동 성범죄자의 공무원 임용을 금지한 군인사법, 국가공무원법, 지방공무원법도 개정시한인 올해 5월31일을 넘기면서 아동 성범죄자가 공무원으로 임용돼도 막을 법적 근거가 없는 상태다.

"늑장 개정과 늑장 입법은 다른 사안" 반론도
이번 사건에서 국가배상 책임이 인정되더라도 모든 입법 부작위 사건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입법 부작위는 크게 부진정 입법 부작위와 진정 입법 부작위로 구분된다. 부진정 입법 부작위는 이미 존재하는 법률이나 시행령이 충분하지 않거나 특정 상황에 적합하지 않은데 입법기관이 보완하거나 개정하지 않아 발생하는 부작위를 말한다. 교통약자 편의시설 설치와 관련된 시행령이 있지만 실제 필요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해 추가 입법이 요구되는 상황이 이런 경우다. 즉 법을 빨리 '안 고친' 것이 문제인 경우다.

진정 입법 부작위는 특정사안에 대한 법률이나 시행령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신기술이나 새로운 사회적 이슈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법률이 제정되지 않은 경우다. 즉 법을 빨리 '안 만든' 것이 문제가 되는 경우다.

수도권 지역 한 판사는 "교통약자의 이동권 문제는 부진정 입법 부작위로 문제가 된 사안에는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진정 입법 부작위 사건에서는 다른 판단이 나올 수 있다"며 "교통약자 이동권 문제는 물리적 장애와 국가의 의무에 관한 사안인데 이를테면 낙태 문제는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맞부딪치는 기본권 충돌 문제라서 동일한 관점에서 볼 수 있을지는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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