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교도소 집단탈옥 사건의 지강헌 /사진=유튜브 캡처
1988년 10월 15일, 지강헌 일당 4명이 서대문구 북가좌동 고모씨 집에 잠입해서 고씨의 가족을 인질로 잡았다.
지강헌은 그해 10월 8일 영등포교도소에서 충남 공주교도소로 이감되던 25명 중 12명과 함께 집단 탈주하고 서울 시내로 잠입해 인질극을 벌이다가 경찰이 쏜 총에 사살당했다.
그는 인질극을 벌이며 "돈 없고 권력 없이는 못 사는 게 이 사회"라면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발언을 했다.
기사 내용과 무관한 참고 이미지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당초 이들은 잡범이었으나 교도권을 흉기로 찌르고 권총을 탈취하면서 흉악범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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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명 중 5명은 그날 밤 검거됐고, 1명은 14일 자수 의사를 밝힌 뒤 체포됐다. 지강헌을 비롯해 안광술, 한의철, 강영일은 10월 15일 오후 9시 40분쯤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의 한 가정집에 들어가 가족을 인질로 잡았다.
사건은 인질 중 한 명이 다음날이 16일 오전 4시 몰래 빠져나와 경찰에 신고하면서 드러났다. 경찰은 거의 모든 경찰력을 현장에 집결시켰고, 매체는 무장 인질극을 생중계했다.
일부 극단적 선택…지강헌, 경찰이 쓴 총에 맞아 사망
영등포교도소 집단탈옥 사건의 지강헌 /사진=유튜브 캡처
지강헌은 경찰에게 1967년 히트곡인 비 지스의 '홀리데이'(Holiday)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요구했다. 그는 '홀리데이'를 들으며 창문을 깨 유리조각을 자신의 목에 갖다 댔다.
총소리가 들리자 경찰은 인질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현장에 진입했다. 지강헌은 경찰이 쏜 총에 맞고 현장에서 검거됐다. 경찰은 그를 인근 병원으로 옮겼으나, 결국 약 2시간 뒤 과다출혈로 숨졌다.
인질극 일당 중 유일한 생존자인 강영일은 이 일로 징역 9년형을 추가로 선고받았으며 2007년 6월 만기 출소했다.
당시 지강헌 일당은 인질극을 벌이면서도 "이해해 달라", "조금만 참아 달라", "해치지 않겠다" 등 흉악범과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인질극에서 풀려 난 가족들은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실감 났다"며 강영일의 선처를 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피곤한 교도관 노려 탈옥…근무여건 개선
기사 내용과 무관한 참고 이미지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당시 교도관들은 사실상 25시간씩 근무해야 하는 '2부제'라는 가혹한 환경에 처해 있었다. 지강헌 일당 역시 교도관들이 피곤해서 이송 중 곯아떨어질 것을 예상하고 일을 벌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2부제는 3부제로 전환됐다.
아울러 사건을 촉발한 원인 중 하나인 보호감호제도 역시 '이중처벌'이라는 지적을 받으면서 개정돼 2005년 폐지됐다.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가 "상습범은 형기 종료 후에도 즉각적인 사회 복귀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시설에 가두는 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