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햇빛 두 개 더

머니투데이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2024.10.11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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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슈퍼에 가 '설레임' 아이스크림 있냐고/ 묻는다는 것이/ 망설임 있어요, 라고 잘못 말했는데/ 가게 주인이 아무 망설임 없이/ 설레임을 꺼내다 준다// 영화관에서 단적비연수 두 장 달라는 것을/ 단양적성비 두 장 달라고 말했는데/ 단적비연수 표를 내줬다는,/ 형식과 내용이 합일하는 이런 경이로움을/ 나는 사랑한다/ (…) // 해피 투게더를/ 햇빛 두 개 더, 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후배 시인이 아는 할머니 한 분은/ 헤이즐넛 커피를 해질녘 커피로/ 알고 있다."

고영민 시인의 신작 시집 '햇빛 두 개 더'(문학동네)에 수록된 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한 대목이다. 어떤 단어나 문장의 발음이 다른 의미를 지닌 언어로 들리는 '몬더그린'(mondegreen) 현상을 소재로 한 재미있는 시다. 나는 초등학교 때 OMR카드 답안지에 시험문제의 답을 표기하라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야구의 '5회말'을 떠올린 일이 있다. 왕년의 야구선수 가득염 투수를 야구와 농구를 겸하는 '가드 겸 투수'로 오해한 적도 있다. 잘못 알아들어도 결국 다 소통된다. 일상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몬더그린 현상은 개그프로그램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에릭 카르멘의 노래 '올 바이 마이 셀프'(All by my self)를 "오빠 만세"로 부르거나 알 켈리의 '아이 빌리브 아 캔 플라이'(I believe I can fly)를 "아버지는 계란프라이, 어머니는 계란토스트프라이"로 부르는 식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세계는 언어와 의미로 이뤄진 상징계다. 상징은 심미적으로 형식과 내용의 일치를 추구한다. 고급 세단과 명품 슈트가 부의 형식이 되듯 내용이 요구하는 형식, 형식이 요구하는 내용이 분명하다. 오목한 파트와 볼록한 파트가 결합하는 레고처럼 상징은 형식과 내용이 맞아떨어져야 의미작용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끔은 근사한 문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대충 머리만 집어넣으면 다 들어가지는 개구멍을 통과할 때 쾌감을 느낀다. 우리는 왜 강변의 유원지에서 멀쩡한 팬을 두고 펑퍼짐한 돌판을 주워다 삼겹살을 굽는가. 왜 바닷가에서 소주잔 대신 소라껍데기에 술을 따라 마시는가. 문 아닌 것이 문이 되고 잔 아닌 것이 잔이 될 때 원리와 규칙으로 빽빽한 상징계가 헐거워진다. 그 헐거운 틈으로 빛이 들고 숨이 들고 새소리와 빗물이 들어 고착된 기존 의미세계는 새로운 해석의 예감으로 약동하게 된다.

설레임과 망설임, 단양적성비와 단적비연수, 해피 투게더와 햇빛 두 개 더, 헤이즐넛 커피와 해질녘 커피는 모두 '형식과 내용이 합일하는 이런 경이로움'이다. 이 시구에는 투명한 괄호 안 문구가 있다. 다시 읽자면 '(서로 생판 모르는) 형식과 내용이 (뜻밖에) 합일하는 (황당한) 경이로움'이다. 한 할머니가 니××발아파트 가달라고 했더니 알아서 리젠시빌아파트에 내려드렸다는 어느 택시기사의 이야기도, 봄여름가을겨울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20년도 더 된 히트곡인데 "브라보, 브라보"를 그동안 "꿈을 안고, 꿈을 안고"로 알았다는 내 친구 박진형의 이야기도 모두 형식과 내용의 경이로운 합일을 보여준다.



고영민 시인의 시와 몬더그린 현상은 일그러지더라도 어떻게든 의미에 도달하는 언어의 탄력적인 자율성과 복원성을 보여준다. 이 세상은 고정불변하는 종료된 사건이 아니다. 세계도, 언어도, 그리고 우리도 모두 흐르고 변하는 것임을 받아들일 때,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성 대신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더 바짝 끌어안을 때 사랑은 패스워드처럼 반드시 '단적비연수'여야만 열리는 살벌한 보안의 세계가 아니라 '단양적성비'여도 망설임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장날의 잔치판이 된다. 우리는 일치의 일치보다 불일치의 일치에 더 매혹을 느끼며 완벽히 이해할 수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는 사람들이다. 한 치의 오차 없는 발화보다 잘못 말한 '햇빛 두 개 더'와 '해질녘'이 더 아름다운 여기가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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