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표정한 아빠 영정 사진이 맘 아파, 웃는 얼굴로 바꿔달란 말에 기꺼이 응해준 이들. 희진씨는 그날 참 많이 울었다고 했다./사진=박희진씨 제공
8월 29일은 희진씨에게 참 고된 날이었다. 털썩, 집에 와 묵직한 모래 자루처럼 침대에 널브러졌다. 그대로 누워 여느 날처럼 정지된 아빠 얼굴을 바라봤다.
"유독 안 좋은 표정으로 저를 보고 계시더라고요. 혹시 하늘나라에서도 편찮으신가. 아님, 제 걱정에 잠을 못 이루시나.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요. 아빠 사진이 웃고 계셨으면 싶었어요. 그걸 걸고 얼굴 보며 하염없이 대화하고요. 그럼 너무 행복할 것 같았지요."
'울 아빠 영정사진인데 웃고 계신 모습으로 바꿔줄 수 있을까? 여기 능력자분들 많던데. 사랑하는 울 아빠. 볼 때마다 표정이 안 좋아 보이셔서 너무 가슴이 아파.'
첫 댓글이 달리는 순간 희진씨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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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입가에 주름이 깊이 패도록 환히 웃고 있어서였다.
커다란 나무였던 아버지…어느 날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희진씨 부친의 검사 사진. 폐암 말기였고, 이미 온몸에 퍼진 상태여서 손을 쓸 수가 없었다./사진=박희진씨 제공
"폐암 말기인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허리까지 전이가 됐다고, 이 정도면 손 쓰기 힘들 것 같다고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까만 부분이 다 암세포라고, 이렇게 될 때까지 어떻게 참았냐고 놀라시더라고요."
목수였던 아빠는 희진씨에게 커다란 나무였다. 어린 나이에 아빠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다고 했을 때. 이혼한 뒤 홀로 아등바등 애를 키울 때. 아빠는 나약해지지 말라고, 자주 전화해 모진 말로 희진씨가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해줬다. 그 힘으로 15년간 아이를 잘 키워냈다.
이후 아빠와 함께 일하던 분이 이리 말해주었다.
"아빠가 저랑 전화 통화하고 끊고 나면, 혼자 많이 우셨대요. 따끔한 말 해놓고 아빠도 힘드셨던 거겠지요. 오냐오냐 해 주셨으면 아마 그때 못 버텼을 거예요."
곤히 주무시던 날 '삐-' 소리…커다란 나무가 흙으로
병원에서 이발하는 희진씨 부친 사진. 병원에도 봄은 찾아왔고 꽃은 피었고, 깔끔하게 단장하고 아빠와 마지막 꽃 구경을 갔다./사진=박희진씨 제공
"슬프거나 힘들거나 지쳐도 묵묵히 그 자리에서 제가 쉴 수 있게 해주신, 아빠는 제게 커다랗고 든든한 나무셨어요."
한 시절을 살아내었고, 작은 존재를 사랑으로 키워내었고. 2~3일에 한 번은 딸과 한 시간씩 통화로 수다를 떨 만큼 다정한 친구였고. 사계절이 수십 번 돌도록 한 자리에 우직하게 우뚝 서 있던 커다란 나무. 그 나무가 이제 제 몫의 세월을 다하고 다시 땅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아빠의 웃음을 더 보고 싶었다. 단 하루라도 더. 출장 이발하는 분을 불러서 머리를 예쁘게 깎아드렸다. 봄이 왔다. 휠체어를 태워드려 병원에 핀 꽃도 구경시켜 드렸다.
마지막 날. 아빠가 만나는 분과 오빠와 희진씨까지, 셋이 병실에 모였다.
"너무 곤히 주무셨어요. 다른 날처럼 끙끙 앓는 소리도 없이. 오늘은 통증이 덜하신가 보다, 얘기하는데 갑자기 '삐-'소리가 나더라고요. 생각해보면 자식들이 임종 지켜서 맘 편하라고, 그런 상황을 만들어주셨구나 싶었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무표정한 아빠 영정사진 맘 아파…"웃는 모습으로 바꿔주세요" 부탁에
처음엔 이리 무표정했던 희진씨 부친의 영정 사진. 경황이 없는 와중에 선택한 사진인데, 바꿀 수 없다고 해서 정해졌단다. 희진씨는 SNS 친구들에게 웃는 모습으로 바꿔줄 수 있느냐고 요청했다./사진=박희진씨 제공
다른 사람 꿈에는 잘 나오면서, 희진씨에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아빠. 서운하고 속상했던 날. 그날 SNS 친구들에게 그리 요청한 거였다. 아빠 영정사진을 웃는 모습으로 바꿔줄 수 있느냐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아버지 영정 사진을, 기꺼이 시간을 내어 환히 웃는 모습으로 바꿔준 이들. 세상은 여전히 살만하다고./사진=박희진씨 제공
"진짜 눈물이 펑펑 나는 거예요. 참 신기했던 게, 만들어주신 사진이 정말 생전에 아빠가 활짝 웃고 계신 모습과 똑같이 닮아서…. 표현하기 힘들 만큼 감사했지요."
순식간에 영정사진으로 따스하게 덮인 댓글을 봤다.
다양하게 웃는 모습의 사진들이 댓글창에 쏟아졌다. 희진씨는 그 따스함에 한참을 울었다./사진=박희진씨 제공
'자연스러운 웃음으로 올려봐요.'
자연스레 웃는 모습의, 희진씨 부친 영정사진./사진=박희진씨 제공
'(영정사진을) 좀 젊게 해 드렸어^^'
무채색 그림으로, 보드라운 선으로 영정 사진을 만들어준 이도 있었다./사진=박희진씨 제공
AI 기술은 이리 쓰면 좋지 않겠느냐고./사진=박희진씨 제공
진정 가슴을 울리는 위로였다고, 희진씨는 도와준 모든 이들을 일일이 찾아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단다. SNS 친구가 만들어준, 희진씨 부친의 영상./사진=박희진씨 제공
영상으로 만들어준 이까지 있었다. 아빠의 생전 목소리와 아빠에게 듣고픈 얘길 전해달란 이가 있었다. 얼마 뒤 영상이 도착했다.
"희진아, 아빠는 이제 하나도 안 아파. 아빠는 지금 행복해, 괜찮아."
커다란 나무 같았고, 가장 좋은 벗이었던, 이제는 고인이 된 희진씨 부친의 묘. 아빠를 만나러 가던 길. 그날따라 하늘이 참 파랗게 맑았다고 했다./사진=박희진씨 제공
"정말 그날 하루 종일 펑펑 울었어요. 너무너무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고, 위로의 댓글을 달아주셔서요. 마음 같아선 한 분 한 분 다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싶었지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의 부탁이잖아요. 솔직히 못 본 척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데. 아직은 그래도 세상이 살만하구나 싶었지요."
끝으로 아빠에게 전하고 픈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다. 희진씨가 고민하다가 이리 말했다.
"아빠, 다음 생애는 꼭 내 아들로 태어나요. 이번 생에 제가 못 해준 것들 다 해드릴 테니까. 자주 못 찾아뵈어서 죄송해요. 부디 하늘나라에선 일 생각만 하지 마시고, 편하게 행복하게 지내셔야 해요."
리마인드 웨딩 때 나란히 앉아, 환하게 웃는 아빠와 딸. 하늘나라에서 이 모습을 또렷히 기억하며, 여전히 활짝 웃고 있을 거라 믿는다./사진=박희진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