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깊이 읽기가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리라 [PADO]

머니투데이 김동규 PADO 편집장 2024.07.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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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어떻게 배움을 추구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 아이들을 가르칠 것인가라는 문제는 영원한 숙제인가 봅니다. 예일대에서 10년간 영문학을 가르쳤던 윌리엄 데레저위츠는 2008년에 학교를 떠나 현재는 전업 에세이스트,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그는 PADO가 이전에 소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대학 캠퍼스 밖에서 진정한 배움, 진정한 인문학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탠포드라는 서부지역에서 이런 운동을 하는 테드 지오이아와는 달리 동부 뉴욕을 중심으로 이 운동을 펼치고 있는 데레저위츠는 야스차 뭉크Yascha Mounk 존스홉킨스대 국제학대학원 교수가 프랜시스 후쿠야마 등과 함께 창간한 온라인 매체 Persuasion에 2024년 5월 29일 기고한 글에서 '고전' 읽기를 중시합니다. 느리게 조금씩 음미해가며, 그리고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해가며 인류의 지혜가 담긴 고전을 읽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물론 이런 식의 배움이 대학 캠퍼스에도 가능합니다만, 현재 미국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워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우리의 경우는 더 어려울 것입니다. 제대로 번역되어 있는 고전이 드물뿐더러 그런 '느린 배움'을 허용하는 분위기도 아닐 듯 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 골몰한 시대라서 더욱 그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류가 이 세상에 나타난 이후 인류로서 가지는 삶의 문제, 공동체를 꾸리는 문제 등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근본적인 삶과 사회의 문제를 고민해온 선현(先賢)들의 생각은 지금도 도움이 됩니다. 어느 집은 그 집만의 독특한 냄새가 있습니다만, 그 집안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밖에서 온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특징과 한계를 모릅니다. 그것은 그 시대를 탈출했다가 돌아와야 알 수 있습니다. 고전과 함께 하는 시간 동안 우리는 바로 우리가 속한 시대를 이탈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탈의 시간을 거친 후 다시 우리 시대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우리 시대의 특징과 한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이 없이는 우린 난무하는 루머, 유행, 편견, 근거없는 믿음의 급류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데레저위츠는 이 급류에서 벗어나는 자신의 방식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길을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기사 전문은 PADO 웹사이트(pado.kr)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사진=Oscar Ovalle/사진=Oscar Ovalle


고등교육은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많은 부분이 형편없는데 그 어떤 것도 변화할 가능성이 없다. 대학들은 스스로를 개혁할 의향이 없어 보인다. 그럴 의향이 있더라도 방법을 모르며, 알고 있더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관료주의적 관성, 교수진의 저항, 그리고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상충하는 의제 속에서 협동적인 변화는 불가능해 보인다. 게다가 적어도 소수 엘리트 학교에서는 비즈니스가 잘 되고 있다. 일각에선 학생들과 부모들이 하버드와 예일 같은 대학들을 혐오감으로 외면하리라 말하지만 이는 환상에 불과하다. 엘리트 교육기관이 엘리트 고용주로 가는 주된 통로로 남아 있는 한(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가진 자들과 노력하는 자들은 그곳으로 몰려들 것이다. 다른 모든 것--수업, 정치, 예술, 과학--은 부차적이다.

중등(및 고등) 이후의 교육에서 흥미로운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 일들이 대부분 캠퍼스 안에서 일어나지 않을 뿐이다. 사람들은 내게 이런 현상들에 대해 말한다. 그들이 시작했거나, 시작하고 있거나, 참여한 계획들에 대한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이런 현상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이 학부 경험에 대해 제기하는 두 가지 근본적인 불만에 해당하는 것이다. 첫 번째 불만은 대학이 그들을 현실 세계에 준비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논문, 많은 과제들, 무의미한 요구사항, 고립된 학문 분야들과 추상적인 이론 등 대학에서 경험하는 것들은 학생들이 실제로 삶에서 하고 싶은 그 어떤 것과도 동떨어져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만을 해결하는 프로그램들은 놀랍도록 일관된 특징들을 보여준다. 학제적 접근을 취하며, 보통 분리되어 있는 방법론과 관점들--예를 들어 공학과 사회과학--을 통합한다. 비형식적이며 교원 주도 수업과 전통적인 평가 방식을 피한다. 경험을 중시하며, 읽고 쓰는 것보다는 실행--창작, 협동--에 더 초점을 맞춘다. 외부 활동을 중시하며 학생들을 지역사회로 데려가 봉사 프로젝트, 인턴십, 예술 설치 또는 공연에 참여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 접근법이 빠뜨리고 있는 것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것은 인문학을 빠뜨린다. 책을 빠뜨린다. 문학과 철학, 역사와 미술사, 그리고 종교사를 빠뜨린다. 실용적 용도로 바로 전환될 수 없는 모든 종류의 탐구 방식--성찰, 사변, 과거와의 대화--을 빠뜨린다. 세상 모든 것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아니다. 세상을 일련의 '문제'들로 보는 것은 세상과 자아의 잠재력을 제한한다. 어떤 노래가 다루는 '문제'란 무엇인가? 볼테르를 읽는 것이 어떤 문제를 어떤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인가? '문제' 접근법--'참여' 접근법, '세상을 구하자'는 접근법--은 결국 내가 '배움'이라고 부르는 것을 빠뜨린다.



바로 이것이 대학 졸업생들이 표현하는 두 번째 불만이다. 이런 본질적인 의미에서 어떤 것도 배웠다는 느낌 없이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이다. 대학에서의 교육은 감동을 주지도, 스스로를 변화하게 만들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어딘가에 보물--그걸 '고전'이라 부르든 그냥 양서라고 부르든, 인류의 지혜와 가장 훌륭한 사상이 담긴 것--이 있으며 대학 교육의 목적은 그 안에 있는 보물을 일깨우는 것이라고. 학생들은 그런 인류의 지혜에 입문하기 위해 훌륭하다는 교육기관(그 건축물이 문화를 보여주고 그 역사가 깊이를 보증하는)에 들어왔지만 그런 걸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알 수 이유로, 기만당했다고 느낀다.

나는 컬럼비아와 예일에서 이런 학생들을 본 적 있다. 결코 많지는 않았다. 그리고 인문학 관련 학과 등록 현황을 보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2013년부터 2022년까지 영문학 학사 학위로 졸업하는 사람들의 수는 36% 감소했다. 전체 학위 중 비율로는 42% 감소하여 60명 중 1명 미만이 되었다.) 그들은--순례자들, 태아 상태의 지식인들, 불타오르는 영혼들은--그들이 대학에 온 목적인 그런 종류의 교육을 받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내게 말하곤 했다. 교수들은 종종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고, 멘토링이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상담에 대한 인내심이 거의 없었다. 철학과 같은 분야에서조차 수업은 생기 없고 비인격적으로 느껴졌으며 마치 숫자 대신 단어를 사용하는 공학 같았다. 무엇보다도 최악은 동료 학부생들, 출세주의자들과 경력주의자들이었다. "주변의 모두가 자기 영혼을 팔려고 할 때 자기 자신의 영혼을 구축하기는 어려워요." 한 학생이 한번은 이렇게 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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