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풍'을 잡아주는 설경구의 묵직한 무게감

머니투데이 이덕행 기자 ize 기자 2024.07.02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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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넷플릭스/사진=넷플릭스


제목값을 해야겠다는 듯 급변하는 전개와 반전의 연속으로 휘몰아치는 '돌풍'을 보고 있으면 12부작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자칫 바람에 휩쓸려 날아갈 수 있지만, 이를 잡아주는 건 묵직한 무게감으로 중심을 잡아주는 배우 설경구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돌풍'(연출 김용완·극본 박경수)은 세상을 뒤엎기 위해 대통령 시해를 결심한 국무총리와 그를 막아 권력을 손에 쥐려는 경제부총리 사이의 대결을 그린 이야기다. 설경구가 맡은 박동호는 초심을 잃고 타락한 대통령 장일준(김홍파)에게 하야를 요구했다가 되려 위기에 처한 국무총리다. 벼랑 끝에 몰린 박동호는 부패한 세력을 쓸어버리기 위해 대통령 시해라는 극단적인 결심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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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의 '삼식이 삼촌'이 송강호의 첫 드라마로 화제를 모았다면 넷플릭스는 '돌풍'의 설경구를 통해 응수했다. 1990년대 '큰 언니'·'사춘기'·'코리아 게이트' 등에 출연하기는 했지만 모두 조·단역이었던 설경구가 데뷔 후 처음으로 드라마 주연작으로 선택한 작품이 '돌풍'이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작품 기준으로는 '야차'와 '길복순'에 이어 세 번째 작품이다. 20여년 간 영화판에서 활동하던 설경구는 오랜만에 긴 호흡의 작품을 만났지만,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는 말처럼 지금껏 쌓아 올린 연기 경력을 보여주고 있다.



'추적자 THE CHASER', '황금의 제국', '펀치'로 '권력 3부작'을 선보였던 박경수 작가가 '귓속말'을 거쳐 7년 만에 선보인 '돌풍'은 첫 화부터 마지막까지 강약을 조절하기보다는 '강강강강'의 전개로 속도감을 높인 작품이다. 제목처럼 시종일관 휘몰아치는 작품이기 때문에 이를 끌고 가는 주인공의 연기가 중요하다.

'내가 내린 답을 정답이라고 믿고 끝까지 밀어붙이겠다'고 말하는 박동호는 폭주 기관차 같은 추진력을 장착한 인물이다. 설경구는 우직하지만 절대 멈추지 않는 박동호의 전진을 단단하게 그려내며 시청자를 끌고 간다. 물론, 홀로 달려 나가기만 한다면, 시청자가 따라가기에 조금은 벅찰 수 있다. 설경구는 때로는 눈빛과 표정만으로 공간을 지배하며 시청자들이 따라올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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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영화 '킹메이커'를 통해 정치인을 연기했던 설경구는 2년 만에 정치인 역할을 다시 맡게 됐다. 그러나 '돌풍'의 설경구에게서는 '킹메이커'의 설경구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기본적인 차이는 배역이 어떻게 만들어졌냐에서 시작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킹메이커의 김운범은 분명한 모티프를 가지고 있다.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참조해야 할 레퍼런스이자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존재했다.

반면, 박동호는 대한민국 정치계의 여러 인물들의 일화를 섞어놨지만, 뚜렷하게 모티브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없다. 설경구에게는 조금 더 자유로운 해석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캐릭터 해석이 자유로워지자 설경구의 오랜 내공이 빛을 발했다.

특히 박동호는 분명 주인공이지만 선한 인물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첫 등장부터 대통령 시해를 결심했을 뿐 아니라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스스로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실존 인물을 모티프로 했다면 다소 예민할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허구의 인물이기 때문에 이런 지점에서는 조금 더 과감하게 나아가며 캐릭터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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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政敵) 정수진을 연기한 김희애와의 맞붙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오랜 연기 경력에도 좀처럼 같은 작품에 출연한 적이 없던 두 사람은 영화 '더 문', '보통의 가족'에 이어 '돌풍'까지 무려 세 작품을 연달아 함께했다. 서로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함께 늪에 빠지려는 박동호와 자신만은 늪에서 벗어나려는 정수진의 첨예한 대립은 설경구와 김희애의 불꽃 튀는 연기 대결로 인해 더욱 빛을 발한다. 김미숙, 김영민, 김홍파, 임세미, 전배수, 김종구, 장광, 박근형 등 출중한 연기력을 가진 배우들과의 호흡에서도 단단하게 중심을 잡아주며 극을 이끌어 나간다.

급변하는 전개와 반전, 파격적 결말에 더해 실제 사건을 연상시키는 소재를 곳곳에 심으며 좌와 우를 '모두까기'하는 '돌풍'은 여러모로 휩쓸리기 좋은 작품이다. 그러나 설경구는 긴 호흡 속에서도 묵직한 무게감으로 중심을 지긋이 눌러주며 시청자를 무사히 결말까지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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