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에 빼앗긴 섬, 155년만에 중국 품으로[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양성희 기자 2024.07.01 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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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7월1일 홍콩, 영국 식민지 벗어나 중국으로 반환

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홍콩의 야경/사진=게티이미지뱅크홍콩의 야경/사진=게티이미지뱅크


오후에 홍차를 즐기는 나라 홍콩은 영국의 오랜 식민지였다. 지금도 영어를 쓰고 홍콩달러가 통용되는 등 영국 색이 짙다. 27년 전 1997년 7월1일 중국 영토로 복귀했어도 국제도시로서 홍콩은 그대로다.

현재 홍콩은 중국의 특별행정구로 주권이 중국에 있다. 외교, 국방을 제외한 분야에서 2047년까지 50년간 독립성을 약속받았다. 하나의 국가, 두 개의 체제를 가리키는 '일국양제'의 형태를 띤다.



영국과 중국 스타일이 뒤섞인 홍콩은 혼란스럽다. 중국화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움직임도 일면서 홍콩엔 '불안한 평화'가 이어지고 있다.

홍콩, 155년 만에 영국에서 중국으로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된 건 1997년 7월1일. 영국 식민지로 지낸 지 155년 만이었다.



이날이 도래하기까지 영국과 중국은 1982년부터 팽팽한 교섭을 벌였다. 양국은 1984년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홍콩의 중국 반환에 합의했다. 중영공동선언을 통해 홍콩반환협정을 발표하면서다.

협정문의 주요 내용은 1997년 7월1일을 기점으로 영국이 홍콩 전역을 중국에 반환하고 중국은 이곳에 특별행정구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또 중국은 1997년 이후 50년간 홍콩의 현행 체제를 기본적으로 유지하고 외교·국방을 제외한 홍콩 주민의 자치를 인정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영-중 줄다리기 시작된 1842년 아편전쟁
홍콩을 둘러싼 영국과 중국의 줄다리기는 18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42년 1차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청나라와 난징조약을 맺고 홍콩섬을 할양받았다. 이후 1860년 2차 아편전쟁에서도 이겨 구룡반도를 받으면서 홍콩의 영역을 넓혔다. 이어 1898년 신계를 임차하면서 식민지를 확장했다.


홍콩은 1941년~1945년 일본의 지배를 받기도 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영국의 홍콩 반환 문제가 논의됐다. 이어 1982년 마거릿 대처 영국 수상이 방중하면서 영국과 중국의 협상이 시작됐다. 할양이 아닌 임차한 신계 지역의 기간 만료가 다가온 것이 협상의 계기였다.

당초 영국은 임차기간 연장 등도 고려했으나 중국은 과거 난징조약 등이 무효라고 맞서면서 양국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렸다. 영국은 홍콩을 두고 전쟁을 벌일 수는 없다는 판단에 홍콩을 중국에 돌려주는 데 이르렀다.

2층 버스와 트램이 다니는 홍콩 시내 모습/사진=게티이미지뱅크2층 버스와 트램이 다니는 홍콩 시내 모습/사진=게티이미지뱅크
2층 버스, 애프터눈 티세트…홍콩에 밴 영국 문화
155년이란 긴 세월 때문인지 중국령인 홍콩엔 여전히 영국 색이 많이 묻어있다. 영국령 시절에 쓰던 홍콩달러를 여전히 통용하고 영어도 공용어와 다름없이 쓴다. 빨간색 이층 버스 등 도시 경관도 비슷하다.

유명 호텔에서 즐기는 애프터눈 티 세트도 영국의 문화다. 2~3층 트레이에 여러 종류의 디저트를 담아 홍차와 함께 즐기는 것을 가리킨다.

홍콩은 영국 식민지 시절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항구 도시로 번성했다. 여전히 '아시아의 금융 허브'로 역할하고 있다.

2019년 6월9일 홍콩에서 '범죄인 인도법'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시위에 나선 모습. 주최측 추산 100만여명이 참여했다. /사진=뉴스1(AFP)2019년 6월9일 홍콩에서 '범죄인 인도법'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시위에 나선 모습. 주최측 추산 100만여명이 참여했다. /사진=뉴스1(AFP)
일국양제 속 우산 든 홍콩 시민들

이러한 문화와 더불어 중국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중국화에 반대하는 홍콩 시민들이 많다. 홍콩에 대한 중국의 간섭은 시진핑 국가주석이 2013년 취임한 이후 더욱 심해졌다.

중국이 행정장관 직선제 약속을 뒤집는 바람에 2014년 우산혁명이 벌어지기도 했다. 홍콩 대학생들은 동맹휴업을 선언하면서 대규모 민주화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가 당국의 최루탄 살포를 우산으로 막아내면서 우산혁명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어 2019년엔 103만명의 홍콩 시민이 거리로 나온, 최대 규모의 민주화 시위가 벌어졌다. 이 역시 홍콩의 중국화를 막으려는 몸부림이었다. 범죄인 인도법에 반대해 시작된 시위는 중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민주화 운동으로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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