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썩어서' 폐기하는 한국…'씻어서' 배출한 일본 우유팩 수입

머니투데이 하남(경기)=김성진 기자 2024.06.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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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펄프로 만든 우유팩, 80~90%가 세척 안된 채 버려져...수거해도 쥐가 파먹기도
세척 후 배출 일상화된 일본서 수입...화장지 원단으로 재활용

지난 13일 경기도 하남의 폐우유팩 집하장에서 비닐봉투를 여니 파리떼가 솟아올랐다. 우유팩들이 아무렇게나 꾸겨져 있었다. 모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가져온 폐우유팩들이었다. 세척도, 정돈도 안된 우유팩은 보관 과정에 썩어 재활용하기도 전에 폐기되기 일쑤다./사진=김성진 기자.지난 13일 경기도 하남의 폐우유팩 집하장에서 비닐봉투를 여니 파리떼가 솟아올랐다. 우유팩들이 아무렇게나 꾸겨져 있었다. 모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가져온 폐우유팩들이었다. 세척도, 정돈도 안된 우유팩은 보관 과정에 썩어 재활용하기도 전에 폐기되기 일쑤다./사진=김성진 기자.


요즘 난리인 러브버그는 비할 데가 아니었다. 오므려진 비닐봉투의 입구를 여니 불꽃놀이처럼 '확' 시커먼 파리떼가 솟아올랐다. 경기 하남에서 폐우유팩 집하장을 운영하는 이만재 대원리사이클링 대표는 "국내 모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가져온 우유팩"이라 했다. 그런데 비닐 안의 우유팩들이 제멋대로 꾸겨져 있었고, 우유가 아니라 치즈에 가까운 시큼한 냄새가 났다. 이 대표는 "파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수북이 쌓인 우유팩의 무덤 어딘가에는 쥐들이 새끼를 낳았다. 쥐와 새끼는 우유팩 안에 남은 우유를 핥고, 갉아 먹었다.

재활용 전에 썩어...'고급' 침엽수 펄프 폐기행
수거한 폐우유팩을 압축한 묶음. 제지공장에 운반해 휴지, 키친타올 등 위생용지를 만드는 데 재활용한다. 하지만 세척하지 않고 버려진 우유팩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이중 20~30%는 도중에 썩거나 냄새가 심해 폐기해야 한다고 한다./사진=김성진 기자.수거한 폐우유팩을 압축한 묶음. 제지공장에 운반해 휴지, 키친타올 등 위생용지를 만드는 데 재활용한다. 하지만 세척하지 않고 버려진 우유팩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이중 20~30%는 도중에 썩거나 냄새가 심해 폐기해야 한다고 한다./사진=김성진 기자.
29일 제지업계에 따르면 국내 우유팩의 재활용률은 24.7%다. 최신 통계인 2022년 기준이다. 우유팩 3만8719톤을 소비했고, 이중 9561톤만 재활용됐다. 재활용 의무율 29.3%에도 못 미쳤지만, 24.7%도 사실상 '과장된 통계'라는 게 제지업계의 해석이다. 재활용을 위해 수거한 우유팩 중에도 20~30%는 중간에 썩거나 재활용하기에 냄새가 너무 심해 폐기하기 때문이다.



우유팩의 재활용 가치는 크다. 현재는 우유팩을 일반 종이와 같이 버려 상당수가 택배박스의 원료인 골판지로 재활용되는데 제지업계 관계자는 "자원 낭비"라 꼬집는다. 골판지는 온갖 종이를 섞어 만들어, 업계 용어로 '하급지'다.

반면 우유팩은 북미와 북유럽의 고급 침엽수 펄프로 만든다. 장섬유이기 때문에 우유팩으로 한번 사용한 후에도 질긴 강도가 유지돼 휴지와 핸드타올, 특별한 경우는 키친타올로도 재활용된다.



하지만 이는 분리배출되고, 세척됐을 때의 얘기다. 환경부 규정상 2022년부터 우유팩과 멸균팩은 종이와 별개로 분리배출하도록 됐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세척은 더 큰 문제다. 한 우유팩 수거업체 관계자는 "우유팩의 80~90%가 세척되지 않고 버려진다"고 했다. 학교의 폐우유팩은 세척돼 배출되는 것이 드물다. 요즘은 우유팩을 접는 것조차 안하는 학교도 적지 않다. 학생이 우유가 먹기 싫었는지, 우유가 절반이 남은 우유팩도 있다고 한다.

카페도 문제다. 전체 우유팩의 30%는 카페에서 소비된다고 추산된다. 이중 스타벅스, 할리스 등을 제외하면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들도 우유팩을 제대로 세척하지 않는다는 게 재활용 수거업계의 증언이다. 실제로 하남 집하장에서 한 카페의 폐우유팩이 담긴 박스의 냄새를 맡으니 고약했다. 이만재 대표는 "학생들에 우유팩 세척을 시키기 곤란하다면 카페 아르바이트생에게라도 세척을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 학생들은 씻고, 가위로 오리기까지...국내 산업에 '동아줄'
제멋대로 꾸겨 버린 한국의 우유팩과 씻고 가위로 오린 일본의 우유팩. 둘다 한국의 모 화장지 제조업체가 재활용 용도로 구매한 것들이다./사진=김성진 기자.제멋대로 꾸겨 버린 한국의 우유팩과 씻고 가위로 오린 일본의 우유팩. 둘다 한국의 모 화장지 제조업체가 재활용 용도로 구매한 것들이다./사진=김성진 기자.
우유팩은 원단을 전량 수입한다. 국내에서 원단을 크기에 맞게 재단하고 폴리에틸렌(PE) 코팅을 하고 표면에 상표와 성분을 표기하지만 원단 자체는 전부 수입이다.


수입한 우유팩을 가장 효율적으로 재활용할 방법은 '화장지'다. 류정용 강원대 종이소재과학과 교수는 "같은 우유팩으로 가장 큰 경제 효율을 낼 수 있는 게 화장지"라 말했다. 같은 양으로 화장지를 만들 때 인쇄용지보다 부가가치가 1.5배 크다.

최근 국내 화장지 원단 업계는 저가 수입산의 공세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화장지의 원료인 펄프를 대부분 수입하는데 펄프를 자체 생산하는 중국과 인도네시아 기업들이 100% 펄프로 만든 화장지 원단을 국산보다 20~30% 낮은 가격에 판매하고 있다. 업계는 국내 산업이 고사해 앞으로 요소수보다 극심한 화장지 품귀 현상을 겪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국내 화장지 원단업계는 수입산 화장지와 가격 경쟁을 위해 일본산 우유팩을 수입하고 있다. 우유팩을 재활용하면 화장지 원가의 20~30%를 낮출 수 있다. 일본은 수거가 잘돼 해상 운임료 등을 다 합쳐도 국산 폐우유팩과 가격이 비슷하다. 학교에서 우유팩을 세척, 가위로 오리는 교육이 철저해 폐우유팩의 품질도 우수하다. 제지업계 관계자는 "한국도 똑같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 화장지 산업이 무너지면 우유팩을 재활용할 사용처가 부족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우유팩은 형광증백제를 함유하지 않아 미용 화장지로 재활용할 수 있지만 수입산 100% 펄프 제품이 저가로 유통돼 자취를 감췄다. 류정용 교수는 "국내 산업이 밀릴수록 우유팩을 재활용할 방안도 하나둘 사라진다"고 경고했다.

일본은 자국 우유팩을 재활용한 휴지의 포장지에 전용 마크를 그려 소비를 유도한다. 한국은 공공 조달 구매에서도 우선 구매 항목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제지업계 관계자는 "우유팩의 분리배출과 세척을 일상화해 재활용을 활성화하고 공공구매라도 재활용 화장지를 우선 구매해 전체 재활용 시스템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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