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캐던 소녀, 큐대 잡더니 '국민영웅' 됐다…"한국은 기회의 땅"[인터뷰]

머니투데이 남양주(경기)=김미루 기자 2024.06.2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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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 '웰컴인!' 대한민국

편집자주 이르면 올해 우리나라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기준 '다인종·다문화 국가'가 된다. 다문화 인구, 장기 체류 외국인 등 이주배경 인구의 비중이 5%를 넘어서면서다. 합계출산율 0.7명으로 인구절벽을 향해 달려가는 대한민국. 국가소멸로의 질주를 멈출 방법은 사실상 이민을 늘리는 것뿐이다. 이주민 또는 다문화 시민들과 함께 화합과 번영을 이룰 방법을 찾아본다.

지난 21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 PBA 스타디움에서 열린 '우리금융캐피탈 PBA 챔피언십' 8강을 앞두고 연습 중인 스롱 피아비(34). /사진=김미루 기자지난 21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 PBA 스타디움에서 열린 '우리금융캐피탈 PBA 챔피언십' 8강을 앞두고 연습 중인 스롱 피아비(34). /사진=김미루 기자


"고향에 갔는데 새벽에 닭이 우니까 잠을 못 자겠는 거예요. 나는 안 졸린데 아버지는 저녁 7시면 잠들고요."

스롱 피아비(34)는 캄보디아 국적의 프로당구 선수이자 한국살이 15년차 주부다. 그는 이제 한국 생활이 더 익숙하다. 지난 5월 캄보디아 친정 집에 들렀을 때 저녁 7~8시면 한 방에서 잠든 가족들 사이에 그의 눈만 말똥말똥했다. 결혼 전 매일 새벽 듣던 닭과 개구리 울음소리가 이젠 어색했다. 고향을 떠나기 전 아버지와 함께 망치질해 지은 나무 집은 이제 낯선 공간이었다.



피아비 선수는 2010년 충북 청주 인쇄소 사장이었던 김만식씨(62)와 결혼하며 한국에 왔다. 감자밭을 주로 일구는 캄보디아 시골 캄퐁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한국에 시집간 동네 여자들 부모가 크고 안전한 집을 짓고 사는 모습을 보고 한국행을 결심했다.

결혼 이듬해 남편을 따라 우연히 동네 당구장에 가 당구를 배웠다. 밥 먹고 잠드는 시간을 빼면 연습에 매진했다. 남편 김씨는 하루 10시간 연습에 아내가 지쳐도 "쓰러져도 당구장에 가서 쓰러져야 한다"고 하는 엄격한 코치였다. 그는 평일에 인쇄소에서 돈을 벌고 주말에는 전국에서 열리는 대회장에 아내를 데려다주며 뒷바라지했다.



전국 동호인 대회 '도장 깨기'를 하더니 2017년 정식 프로 데뷔 후에는 여자 스리쿠션 1위를 차지했다. 이듬해 세계선수권대회 3위, 그다음 해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챔피언이 됐다. 현재 국내 여자프로당구 LPBA에서 누적 상금 2억6277만원으로 2위에 올라 있다.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가 없는 캄보디아에서 피아비 선수는 영웅이 됐다. 당구협회가 없어 국제 대회에 참가하지 못한 그를 위해 2018년 캄보디아가 협회를 창설했을 정도다.

15년 차 '대한외국인'…"저 운전도 무사고예요"
지난 22일 PBA 이재석 선수의 경기 남양주시 당구 연습실에서 만난 스롱 피아비. 프로 데뷔 후에는 시합장에 직접 운전해 이동한다. /사진=김미루 기자지난 22일 PBA 이재석 선수의 경기 남양주시 당구 연습실에서 만난 스롱 피아비. 프로 데뷔 후에는 시합장에 직접 운전해 이동한다. /사진=김미루 기자
그는 한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대한외국인'이기도 하다. 결혼 전 '가갸거겨'만 배우고 한국에 왔던 그는 사인을 요청받으면 팬의 한글 이름을 잘 쓸 수 있을 정도로 한국어 실력이 늘었다.


운전은 완전히 숙달했다. 프로로 데뷔한 2017년부터는 남편 도움 없이 스스로 운전해 대회장에 나섰다. 지난 21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 PBA 스타디움에서 시합을 치른 다음 날에도 직접 자차를 몰고 경기 남양주시에 있는 PBA 이재석 선수의 당구 연습실에 왔다. 남편 김씨는 결혼 전부터 "한국에서 생활을 편하게 하려면 말보다 운전을 먼저 배워야 한다"고 했다. 피아비 선수는 "천천히 가려고 2차선으로 간다"며 "길도 잘 보고 사고도 내본 적 없다"고 했다.

함께 시간을 보낼 친구들도 있다. LPBA 이유주, 김보라 선수와 PBA 이재석, 노종현 선수와는 가족 같은 사이다. 피아비 선수가 동호인 대회에 다니던 시절 남편 옆에 붙어 수줍게 있는 모습을 이재석 선수가 보고 동호회에 받아줬다. 2021년 10월 상금을 받고 이유주, 김보라 선수에게 제주도 여행을 선물한 적도 있다.

이유주 선수가 처음 본 피아비 선수는 너무 착하고 순진해 안쓰러운 외국인 여자였다. 일을 많이 해 손톱은 검고 적응이 어려워 어디서든 수줍어했다. 외국인 여자 선수가 혜성처럼 등장해 트로피를 휩쓸고 다니니 '한국인이 아닌데 대회에 참가할 수 있나'며 견제받기도 했다. 경기 영상에는 현재까지 피부색과 출신을 언급하는 댓글이 달리기도 한다.

이유주 선수는 "피아비가 10년 동안 캄보디아 아이들 사진을 보여주며 '돕고 싶다'고 했다"며 "사진으로는 잘 못 느끼다가 지난해 실제로 같이 봉사를 가 보니 눈물이 너무 났다"고 했다.

그러면서 처음엔 동정심에 피아비 선수를 챙겼지만 이제는 아니라고 했다. 그는 "피아비는 용감한 여자다. 피아비 꿈이 남편 김씨의 꿈이 됐고 제 꿈도 됐다"고 말했다.

지난 22일 경기 남양주시 연습실. LPBA 이유주 선수(오른쪽)와 가족 같은 사이다. /사진=김미루 기자지난 22일 경기 남양주시 연습실. LPBA 이유주 선수(오른쪽)와 가족 같은 사이다. /사진=김미루 기자
한국은 '기회' 있는 나라…올해 결혼이주여성 선수 LPBA 데뷔도
2010년 충북 청주 신혼집에 걸린 인쇄물. 남편은 고국의 현실을 알게 돼 슬퍼하는 아내를 위해 캄보디아 아이들 사진 아래 '나는 이들을 위해 살 것이다'라는 문구를 적어 벽면에 걸어줬다. /사진제공=피아비한캄사랑2010년 충북 청주 신혼집에 걸린 인쇄물. 남편은 고국의 현실을 알게 돼 슬퍼하는 아내를 위해 캄보디아 아이들 사진 아래 '나는 이들을 위해 살 것이다'라는 문구를 적어 벽면에 걸어줬다. /사진제공=피아비한캄사랑
피아비 선수가 본 한국은 기회가 있는 나라다. 개인이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고 국가의 성장도 견인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피아비 선수는 "10년전 고향에서 감자 농사가 잘돼서 10년 후에는 더 잘 살 게 되겠지,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거꾸로"라며 "여기서 100만큼 힘들게 노력해서 1년에 버는 돈은 캄보디아 사람이 100만배 힘들게 10년을 일해도 못 버는 돈"이라고 말했다.

피아비 선수는 또 한국에 좋아하는 일을 찾을 기회가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캄보디아도 한국처럼 20살 전에 12년간 학교에 다니도록 돼 있지만 세자매의 장녀 피아비는 7학년에 학교를 그만뒀다. 학교에 가려면 왕복 60㎞ 거리 비포장도로를 자전거로 오가야 했다. 공부해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도 있었지만 가족들이 농사를 지어 버는 돈은 1년치 생활비에 그쳤다. 공부를 포기했다.

한국에 온 첫해 남편의 인쇄소 컴퓨터로 '캄보디아'를 검색해보고 현실을 알게 됐다. 남편은 캄보디아 아이들 사진 아래 '나는 이들을 위해 살 것이다'라는 문구를 적어 벽면에 걸어줬다. 벌이가 생긴 뒤로는 개인적으로 기부하다가 아예 '피아비 한·캄 사랑' 재단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봉사하고 있다. 형편이 안 좋은 사람을 먼저 챙기다 보니 부모에게 좋은 집을 지어주겠다는 결혼 전 목표는 뒷순위로 밀렸다. 피아비 선수는 "아버지가 서운해하기도 한다"며 "대신 아버지랑 같이 봉사에 가자고 한다"고 했다.

피아비 선수처럼 성공한 결혼이주여성은 아직 국내에서 보기 드문 사례다. 그러나 그를 따라 당구에서 기회를 찾는 이들도 생겼다. 캄보디아에서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와 귀화한 한은세 선수는 지난 16일 2024-25시즌 개막전 '우리금융캐피탈 LPBA 챔피언십'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피아비가 다문화 당구선수 지망생과 결혼이주여성을 대상으로 당구 레슨을 열기도 했다.

피아비 선수는 "가난한 나라에서 결혼 때문에 한국에 왔냐는 말을 듣거나 낯설어하는 눈빛에 조용해지고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식당, 공장, 농사 일을 하며 아기 낳고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운도 좋았고 노력하니 선수 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10년 남편 김만식씨와 스롱 피아비의 결혼식. /사진제공=피아비한캄사랑2010년 남편 김만식씨와 스롱 피아비의 결혼식. /사진제공=피아비한캄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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