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살 유괴, 살해해놓고 "돈 내놔"…'가짜 인생' 산 20대 여성의 최후[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이은 기자 2024.06.2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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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1990년 6월25일 곽재은 유괴 살인 사건의 범인 홍순영. /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화면1990년 6월25일 곽재은 유괴 살인 사건의 범인 홍순영. /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화면


"30분 전에 재은이만 먼저 보내달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1990년 6월25일 오후 12시쯤. 아파트 단지 내 유치원에서 돌아와야 할 아이가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된 엄마는 유치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을 들은 엄마는 주저앉고 말았다. 곽재은(당시 6세) 양은 엄마가 아닌 누군가의 전화에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누군가 재은이의 반과 이름을 대며 엄마 행세를 했고, 선생님은 별 의심 없이 재은이를 하원 시켰다. 재은이 부모는 혹시나 한 마음에 재은이를 데려갔을 수 있는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리며 수소문했지만 아이를 데려간 이는 없었다.



허위 전화에 사라진 6살 딸…실종 29시간 만에 '몸값 요구'
결국 재은이 부모는 실종 5시간이 지난 오후 5시가 돼서야 경찰에 신고했다. 신고받은 경찰은 유치원 관계자와 재은이 엄마 주변인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유괴 사건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재은이 집 전화에 녹음 장치를 설치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6월 26일 오후 5시. 재은이 실종 29시간 만에 전화기가 울렸다. 전화를 걸어온 이는 "재은이를 데리고 있으니 돌려받고 싶으면 신고할 생각하지 말고 5000만원을 송금해라"라고 요구했다. 젊은 여성 목소리였다.



경찰은 범인이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건 것으로 밝혀냈다. 범인은 첫 전화 10분 뒤 다시 전화를 걸어 재은이 몸값을 받기 위한 은행 계좌번호를 알려줬다. 예금주는 '이상민'이었다. 당시만 해도 금융실명제 전이었고, 이는 가명으로 만든 계좌일 가능성이 컸다.

재은 양 어머니는 전화가 걸려 온 다음 날인 6월 27일 오전에 500만원을 먼저 입금했고, 그날 오후 "나머지 돈을 빨리 부쳐라"라는 범인의 협박 전화에 다음 날인 28일 오전에 2500만원을 추가 송금했다.

경찰은 계좌가 개설된 조흥은행 계좌에서 인출 시도가 있을 시 경찰에 신고하도록 은행 측에 요청했고, 조흥은행 서울 내 전 지점에는 형사들을 배치해 잠복근무하도록 했다. 조흥은행 본점 전산실에도 경찰이 배치돼 해당 계좌의 입출금 상황을 지켜봤다.


유괴 4일째, 몸값 인출 시도한 범인…23세 여성 홍순영이었다
돈이 입금된 양일간 움직임이 없던 범인은 유괴 4일째인 6월 29일 오후 2시 40분, 계좌에서 돈을 인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조흥은행 지점이 아니라 서울 명동 국민은행 본점에 설치된 현금자동지급기에서 30만원 인출이 시도됐다.

잠복근무 중인 모든 형사에게 이 소식이 전달된 가운데, 오후 4시 13분쯤 또다시 출금 시도가 포착됐다. 이번엔 서울 명동 롯데백화점 2층 조흥은행 출장소에 설치된 현금자동지급기였다.

경찰은 해당 위치를 향해 전속력으로 뛰었다. 하지만 범인은 총 260만원을 인출한 뒤 자리를 떠난 뒤였다.

형사들이 주변 사람들을 살펴보던 중 한 형사는 젊은 여성과 눈이 마주쳤고, 묘한 느낌에 그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여성과 함께 지하철에 올라탔다. 수색 결과 이 여성은 범인이 말한 계좌에서 현금 총 290만원을 인출해간 사람으로 밝혀졌다.

1990년 6월25일 곽재은 유괴 살인 사건의 범인 홍순영. /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화면1990년 6월25일 곽재은 유괴 살인 사건의 범인 홍순영. /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화면
이 여성의 이름은 홍순영(당시 23세). 키 160㎝ 정도의 자그마한 체구의 여성이었다.

경찰에 붙잡힌 홍순영은 공범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주장했고, 경찰과 함께 접선 장소라는 서울역에서 한참을 대기했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홍순영은 역으로 열차가 들어오자 갑자기 선로 위로 몸을 던지는 돌발 행동을 하기도 했다. 다행히 기관사가 급정거했고, 그는 경상을 입는 데 그쳤다.

건물 물탱크 뒤에서 시신 발견…유괴 당일 살해 후 몸값 요구
1990년 6월25일 곽재은 유괴 살인 사건의 범인 홍순영. /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화면1990년 6월25일 곽재은 유괴 살인 사건의 범인 홍순영. /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화면
경찰은 병원에 입원한 홍순영에게 재은 양의 위치를 추궁했으나 홍순영은 "사형시켜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재은이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달라는 호소에 그는 결국 "숙명여대 건물 물탱크 뒤에 시신을 은닉했다"고 자백했다. 재은 양은 건물 옥상 물탱크 뒤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홍순영 단독 범행으로 공범은 없었다.

홍순영은 유괴 당일인 6월 25일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다가 유치원 바깥 우산 통에 꽂혀 있는 우산에 적힌 이름을 보고는 엄마인 척 허위로 전화를 걸어 아이를 데려갔다.

재은 양에게 물어 부모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알아낸 홍순영은 집에 보내달라고 보채는 아이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 부모에게 협박 전화를 걸었을 때 이미 재은 양은 숨진 뒤였다.

허영심에 시작한 '가짜' 대학생·기자 행세…남친 환심 사려 유괴
1990년 6월25일 곽재은 유괴 살인 사건의 범인 홍순영. /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화면1990년 6월25일 곽재은 유괴 살인 사건의 범인 홍순영. /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화면
잔혹한 유괴살인범 홍순영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으나 허영심이 강한 성격이었다.

친구들과 달리 대학 입시에 실패하자 대학에 합격한 다른 친구들에게 지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에 합격했다고 거짓말을 했고, 이 거짓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거짓말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합격통지서와 등록금 고지서를 조작했고, 등록금을 타내고 용돈을 받기도 했다.

1990년 6월25일 곽재은 유괴 살인 사건의 범인 홍순영이 가지고 있던 가짜 숙명여대 학생증. /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화면1990년 6월25일 곽재은 유괴 살인 사건의 범인 홍순영이 가지고 있던 가짜 숙명여대 학생증. /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화면
홍순영은 우연히 얻은 학생증으로 본격적인 '가짜 숙명여대생' 행세를 했고, 4년간 몰래 수업을 훔쳐 듣는 것은 물론 MT 등 학교와 과 행사에도 빠짐없이 참여했다.

홍순영은 재수해 정식 합격할 생각으로 거짓말을 이어갔으나 끝내 실패했고, 가짜 졸업 후에는 'KBS 기자' 행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가짜'로 살아온 홍순영의 삶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용돈을 받아 생활했지만 가짜 졸업 후 가짜 취직을 한 탓에 돈이 필요해졌다. 명문대 출신에 대기업에 취직한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위태로웠다. 그에게 거짓말이 들통날까 두려운 마음도 엄습했다.

홍순영은 돈만 있으면 거짓말을 이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 방법으로 '유괴'를 떠올렸다. 홍순영은 몸값을 받기 위해 부유한 동네의 대단지 아파트를 택했고, 한 차례 초등학생 유괴 실패 끝에 조금 더 어린 유치원생 재은 양을 다시 유괴해 살해하고 만다.

1990년 6월25일 곽재은 유괴 살인 사건의 범인 홍순영. /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화면1990년 6월25일 곽재은 유괴 살인 사건의 범인 홍순영. /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화면
홍순영은 수사와 재판을 받는 내내 울음을 터뜨리는가 하면 "제발 사형시켜주세요"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1991년 12월 18일 오후 3시 35분. 홍순영은 원하던 대로 사형이 집행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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