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그리고 인간 작가의 종말

머니투데이 김수빈 에디팅 디렉터 2024.06.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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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가 인간처럼 글을 쓸 수 있다면 인간 창의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편집자주 챗GPT와 DALL-E 같은 도구의 출현과 함께, 얼핏 보면 인간의 작품과 분간이 안 되는 AI 작업물이 범람하면서 인간 '창의성'에 대한 논의가 다시 열기를 띠고 있습니다. 보통 이런 논의는 작품을 감상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많고 '작가'의 입장에 대한 논의는 있더라도 직업상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는 편입니다. 그런데 기자이자 작가인 사만드 수브라마니안은 2024년 4월 22일 뉴리퍼블릭에 기고한 글에서 그간의 논의들을 정리하면서 색다른 시사점도 제공합니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조명하는 것이죠. 독자분들께서도 일기를 쓰면서 그제서야 그동안 갖고 있던 복잡한 생각과 감정이 정리되는 경험이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AI 시대에도 글쓰기를 게을리해서는 안될 이유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글은 인간 지능이 선험적 출발점이라고 보는 플라톤적 관점과 경험적 결과물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을 소개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옳다면 AI의 인공지능도 지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지만, 플라톤이 옳다면 인간의 지능은 인공지능 너머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두 철학자의 논쟁도 염두에 두면서 이 글을 읽으보시면 AI와 인간지능, 창의성에 대해 배우는 바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기사 전문은 PADO 웹사이트(pado.kr)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AI, 그리고 인간 작가의 종말


글쓰기에서 지독하게 싫으면서도 중독적인 요소는 불확실성이다.

'이 글을 누가 읽을까?' 또는 '이 글을 써서 월세는 마련할 수 있을까?'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불확실성이란 바로 글을 쓰는 행위 자체에 있는 불확실성이다.

에세이를 쓰는 직업을 생각해보자. 만 개의 가능성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 보이지도 개념화되지도 않은 만 개의 가능성 중에서 처음 포착된 걸 놓치면 안 된다는 경험에서 나오는 감각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을까?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모른 채 어떤 실을 잡아당기고, 어떤 실을 그대로 두어야 할까? 이러한 과정에서 무슨 아이디어를 골라내 다듬고 주물러서, 이름도 모르는 독자 앞에 내놓아야 할까?

하나의 문장 다음에는 어떤 문장이 오는 것이 가장 나은 것인지, 심지어 어떤 단어가 가장 적합한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예리한 관찰자라면 내가 글쓰기의 본질에 대해 불평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작가의 오랜 특권이다. 작가는 작가의 고유성이라는 안전망 속에서 이런 불평을 토로해왔다. 글쓰기에 대해 불평하는 작가가 아니라면, 누가 글을 쓰려고 했겠는가?

오늘날에는 '챗GPT' 또는 '바드'처럼 그 이름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캐주얼하거나 신화적인 언어 엔진이 등장했다. 이 언어 엔진은 작가들이 겪는 불확실성으로 인한 고통을 추호도 겪지 않는다.

요청만 하면 몇 초 만에 사용설명서와 단편 소설, 대학교 에세이, 소네트(유럽에서 형성된 정형시의 한 종류로 관련된 형식적 규율들은 시대에 따라 진화하였으나, 당시에는 14행의 시 형식이 유행했다), 시나리오, 선전물, 논평 등을 쏟아낸다. 가히 '구토 행위'라 할 만하다.


나오미 S 배런이 '누가 이 글을 썼을까?'(Who Wrote This?)라는 저서에 썼듯, 한 장 분량의 글이 문법을 고뇌하는 인간의 작품인지 아니면 기계의 마찰 없는 내면에서 온 것인지를 독자가 항상 분별해 낼 수 있는 건 아니다.

글 읽기의 운명을 주제로 수십 년째 글을 써온 언어학자 배런은 바로 이런 점이 불안했다.

(계속)



PADO 웹사이트(https://www.pado.kr)에서 해당 기사의 전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국제시사·문예 매거진 PADO는 통찰과 깊이가 담긴 롱리드(long read) 스토리와 문예 작품으로 우리 사회의 창조적 기풍을 자극하고, 급변하는 세상의 조망을 돕는 작은 선물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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