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 356년, 13대 자손이 기업 경영? …"전통과 생존"

머니투데이 다름슈타트(독일)=조규희 기자 2024.06.19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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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베스트 기업을 만드는 힘]②독일 356년 전통 13대 가업 이어가는 '머크'

편집자주 여러 나라, 시장마다 돈을 잘 버는 기업은 많다. 하지만 돈을 잘버는 기업을 무조건 좋은 기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랜기간 꾸준히 성장하면서 시장을 선도하고, 동시에 벌어들인 이익을 바탄으로 나라와 지역사회에 경제 선순환 구조를 만든 회사가 좋은 기업으로 평가받는다. 머니투데이는 반도체와 화학, 제약, 패션 등 주요 분야의 '월드 베스트 기업'을 찾아 기업의 성장 비결과 기업을 일궈낸 경제환경을 조명했다. '메이드 인 코리아' 월드 베스트 기업을 탄생시킬 묘안을 찾아본다.

머크 본사가 위치한 독일 프랑크프루트 다름슈트에는 1668년 약방으로 시작해 전세계 기업으로 성장한 역사를 기록하기 위한 박물관이 마련돼 있다. /사진=조규희 기자머크 본사가 위치한 독일 프랑크프루트 다름슈트에는 1668년 약방으로 시작해 전세계 기업으로 성장한 역사를 기록하기 위한 박물관이 마련돼 있다. /사진=조규희 기자


1668년 독일 다름슈타트, 프리드리히 야코프 머크가 천사약국을 인수해 문을 연다. 356년이 흐른 지금, 머크라는 이름의 기업은 △일렉트로닉스 △라이프사이언스 △헬스케어 등 3개의 사업구조를 바탕에 둔 월드 베스트 기업으로 성장했다.

전세계 65개국에 6만3000명의 직원을 둔 머크는 연 매출 30조원을 자랑한다. 기업명에서 알 수 있듯이 356년의 기간동안 '머크'라는 이름을 유지하며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일반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을 수 있지만 휴대전화 액정을 비롯 바이오 관련 제품, 의학 약품, 화학 소재 등 일상 생활에서 머크의 손길이 닿지 않는 영역이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머크의 오래된 가치와 '전통'을 증명하면서 현대 산업 사회에서 존속하며 성장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13대 가업 승계…70:30의 비밀
초창기 천사약국으로 시작한 머크가의 본격적인 가업 승계는 1715년에 이뤄진다. 그 전까지 후사가 없거나 동생의 아들에게 물려주는 등의 과정을 거쳐 명맥을 이어오다 이때야 비로소 아버지에서 아들로 대를 잇는 전통이 생긴다.



1882년엔 장자 상속 원칙에서 딸들에게도 균등 상속하는 방식으로 변화한다. 후사, 잦은 전쟁 등의 현실적 이유가 컸다. 머크 가문에 속한 구성원이라면 기업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로 전환됐지만 가족 내에서 '인재'를 찾는 데 한계를 느낀다. 기업이 커지고 사업 구조가 다각화되면서다. 자연스레 가업 승계를 유지하면서도 사업 다각화 등을 꾀할 지배구조를 고민하게 된다.

주식합자회사(Merk KGaA) 형태로 운영되는 머크는 70.3%의 주식을 가문이 갖고 있다. 29.7%를 일반 투자자가 소유하고 있는데 '70:30'의 비율이 유지되고 있다. 70%의 무게로 기업의 사활을 가족이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실제론 무한 책임이다. 가문이 소유한 주식은 70%지만 기업의 채무에 대해서는 100% 책임을 진다. 회사가 망하면 가문도 망한다는 인식을 항상 가족 구성원에게 심어주기 위한 조치다.

30%는 시장의 손에 맡긴다. 베네딕트 언스트 머크 일렉트로닉스 전략 부사장은 독일 프랑크프루트 다름슈타트 본사에서 "30%의 의미는 시장에서 머크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외부 평가를 받기 위함"이라며 "머크 가문이 전체적인 시대 흐름을 예측하고 전략과 방향성을 설정하지만 반대로 현재에 충실하고 있는지 부터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시장의 평가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독일 본사 박물관에 있는 한국과의 인연이 담긴 증명서. 1668년 독일에서 시작한 기업이지만 한국과의 관계 또한 깊다. /사진=조규희 기자독일 본사 박물관에 있는 한국과의 인연이 담긴 증명서. 1668년 독일에서 시작한 기업이지만 한국과의 관계 또한 깊다. /사진=조규희 기자
이원화된 지배구조…가족에겐 더 가혹한 취업
회사 경영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지만 회사 경영에 대한 감독은 머크 가문의 직접적인 영향과 통제 아래 이뤄진다.

KGaA는 최고 경영진을 필두로 중역이사회 구성원들로 꾸려진다. 2000년 이후 해당 머크 일가를 제외한 사람들로 구성되는데 이들의 책임 범위가 '무한'이라는 게 특이한다.

고용 형태의 직원에게 실제 운영과 관련한 경영 전반에 관한 권한을 일임하면서도 의무와 책임을 다하게 하는 형태다. 예컨대 중역이사회 구성원에 대한 무한책임의 기간을 '회사에서 물러나거나 파트너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5년까지'로 못 박았다. 단순 관리직에 머물거나 반짝 실적으로 회사의 가치를 속이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다.

KGaA가 일상적인 경영을 책임진다면 머크 그룹가로 대변되는 단체는 E.머크KG다. 가업승계가 유지돼야 하는 만큼 가족 구성원이 가족위원회를 먼저 구성한다. 머크 가문을 대표하는 가족위원회의 주요한 역할은 기업의 경영·감독에 나설 파트너위원회 구성원을 결정하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파트너위원회가 머크 기업 전반을 다루는 KGaA를 관리하는 집단이다. 9명의 구성원 중 5명은 가족위원회 일원으로 채워지며 나머지 4명을 외부에서 충원한다.

당연히 외부인원은 머크 사업 분야의 전문성을 가져야하며 결론적으로 파트너위원회는 KGaA 최고 경영진에 대한 선임·해임권을 갖는다. 가족 구성원 위주로 회사의 주요 결정에 관여하면서 외부 인력의 전문성과 노하우를 적극 활용해 실질적 지배권을 행사하는 구조다.

머크 가문이라고 하더라도 쉽게 경영에 관여할 수 없다. 356년, 13대 가계 승계 구조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가족 구성원으로 채울 수 없는 영역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외부인을 고용했다는 점이다. '머크'라는 이름만으로 함부로 회사에 입사에 우월한 지위를 누릴 수 없다는 의미다.

머크 가문 구성원이 그룹에 입사하려면 외부 기업에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 헬스케어 분야의 그룹장이 되려면 적어도 비슷한 규모의 회사에서 입사해 유사한 직급에서 실력을 증명해야 한다.

언스트 부사장은 "머크 가문의 구성원이 회사에 입사하거나 적극적으로 경영에 참여하는 것을 지양하는 구조는 아니지만 머크라는 이름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은 없다"며 "함께 일하는 동료나 동종 업계서 인정할 정도의 실력을 증명해야 비로소 머크라는 기업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고 말했다.
독일 다름슈타트에 위치한 머크사 이노베이션 센터 전경. 사진제공=머크독일 다름슈타트에 위치한 머크사 이노베이션 센터 전경. 사진제공=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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