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기습에도 압승 거둔 해군…총탄 속에서 서해 지켜냈던 그날[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채태병 기자 2024.06.1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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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1999년 6월15일 오전 발생한 제1연평해전 당시 현장 모습. /사진=대한민국 해군1999년 6월15일 오전 발생한 제1연평해전 당시 현장 모습. /사진=대한민국 해군


25년 전인 1999년 6월 15일 오전 6시10분쯤 북한 경비정 4척이 NLL(북방한계선)을 넘어 대한민국 영해에 들어왔다. 우리 해군은 의도적인 북한의 도발 행위라고 판단해 초계함 2척, 고속정 6척 편대를 현장에 투입했다.

약 1시간 반 뒤인 오전 8시40분쯤 북한은 경비정 3척을 추가로 대한민국 영해에 보냈다. 7척으로 늘어난 북한 경비정은 철수를 요구하는 우리 해군의 고속정에 충돌을 시도했다.



해군의 고속정 6척은 북한 경비정의 움직임에 맞대응하고자, 선체끼리 직접 부딪친 뒤 밀어내기 방식으로 북한 함정들을 NLL 밖으로 내보내려고 했다.

대한민국과 북한의 함정들 간 밀어내기 싸움이 진행되는 도중, 북한의 어뢰정 3척도 현장에 추가로 가담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북한 측이 먼저 화기를 사용했다. 북한 경비정이 우리 고속정에 소총과 25㎜ 기관포 사격을 시작했다.



1999년 6월15일 오전 발생한 제1연평해전 당시 현장 모습. /사진=국방홍보원 유튜브 채널 'KFN' 캡처1999년 6월15일 오전 발생한 제1연평해전 당시 현장 모습. /사진=국방홍보원 유튜브 채널 'KFN' 캡처
북한의 기습 공격에도 우리 해군은 신속하게 반격했다. 해군은 북한 함정들에 대해 밀어내기를 계속하면서 40㎜와 76㎜ 기관포 사격에 나섰다. 양측의 무력 충돌은 약 14분간 이어졌다.

10척의 북한 함정 가운데 멀쩡하게 돌아간 배는 4척에 불과했다. 어뢰정 1척은 침몰했고, 5척의 경비정은 크고 작은 파손을 입었다. 우리 해군은 이 충돌로 최소 30명의 북한군이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반면 우리 해군의 피해는 미미했다. 초계함 1척과 고속정 4척이 일부 파손됐지만,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다. 고속정 승조원 9명만 비교적 가벼운 부상을 입었다. 대한민국 해군이 북한군을 압도한 셈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날의 교전을 1999년 7월 3일부터 '연평해전'으로 명명했다. 이후 2002년 6월 '제2연평해전'이 벌어짐에 따라, 이 전투는 '제1연평해전'으로 불리게 됐다.

경기 평택시 포승면 원정리 해군 제2함대 영내에 설치된 제1연평해전 전승비의 모습. /사진=서해수호의날 온라인 추모관경기 평택시 포승면 원정리 해군 제2함대 영내에 설치된 제1연평해전 전승비의 모습. /사진=서해수호의날 온라인 추모관
북한은 제1연평해전의 원인이 대한민국에 있다는 뻔뻔한 주장을 펼쳤다. 교전 직후 북한 중앙통신은 기다렸다는 듯 "남조선이 우리 영해에 있는 인민군 해군 함정을 침몰시키는 등 무장 도발을 감행했다"며 "즉시 사죄하지 않으면 보복 타격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전했다.

판문점에서 열린 유엔군사령부와의 장성급 회담에서도 북한 측은 "남조선 해군이 먼저 도발했다"고 억지를 부리며, 대한민국과 미군의 사과를 요구했다. 결국 회담은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고, 이후 남북 관계가 화해 분위기로 접어들며 사건은 일단락됐다.

우리 군은 제1연평해전에서 서해 수호에 앞장섰던 해군 유공 장병들을 1계급 특진시켰다. 이는 6·25전쟁과 월남전 이후, 군 당국이 단순 교전 성과로 장병들을 특진시킨 첫 사례다.

해군은 1999년 11월 11일 연평도 당섬에 제1연평해전 승리를 기념하고자 높이 9.35m의 전승비를 설치했다. 이어 2007년 12월 20일 경기 평택시의 해군 제2함대 영내에도 전승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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